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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와 원앙과 해오라기처럼 우리 부부도…
  • 전순란
  • 등록 2019-03-18 15:3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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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7일 일요일, 맑음


양압기를 착용하고 자던 그가 견디다 못해 그걸 벗어서 던져버렸다 다시 주워 얼굴에 썼다를 거듭한다. 얼굴에 철가면을 덮고 자려니 얼마나 불편할지 이해하지만 ‘한 달간 매일 4시간 이상 착용했다’는 기록을 기계의 칩에 남겨야 보험공단이 대불해준다는 양압기. 그 물건을 거의 한 시간마다 썼다가 벗어던지는데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애가 탄다.


▲ 서울집 마당에 피어난 복수초


쓰긴 써야 되는데, 얼마나 불편할까? ‘여보, 너무 힘들지 어쩌면 좋아?’ 그가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당신이 좀 쓰고 자 줄래? 그럼 4시간 흔적은 남잖아?’ ‘아아, 저런 어린아이 같은 사람과 내가 사는구나!’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지리산에 내려가면 각 방에서 편이 자야 할까부다’하던 편한 생각도 싹 사라지고, 밤새 옆에서 ‘여보, 벗은 지 한 시간 됐으니 다시 써볼래요?’하면서 달래고 어르며 같이 늙어가야겠다고 맘을 다 잡는다.


보스코의 ‘배둘레햄’을 빼느라고 2월 한 달 고생했는데 로마 가서 일주일 만에 그 한 달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로마에 동행한 실비아씨 얘기로는 “두 남자(보스코와 유신부님)가 얼마나 달달한 것만 찾는지… 띠라미수, 크림 넣은 크로와쌍, 아이스크림, 게다가 파스타와 치즈와 포도주… 한 여자의 힘으로는 말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제 저녁은 김치죽, 오늘 점심은 순두부찌개, 오늘 저녁은 고구마로 차렸다.


밤새 양압기와 씨름하다 새벽녘 그걸 떼고서야 곤히 잠든 보스코를 깨울 수 없어 그가 일어나는 대로 어린이 미사(9시)에 갔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떠들지만 노래할 때 보면 가사를 다 알고 열심히 부른다. 신부님은 ‘여러분을 도와 잘 사는 사람 만들어주는 게 성경’이라는 서두를 꺼내고서 ‘지난 일주일간 누가 성경을 한 줄이라도 읽은 사람이 있어요?’ 묻지만 한 명도 없었다. 신부님은 허망하셔서 엉겁결에 ‘아, 그렇구나!’ 하셨는데 어린이 말고 어른이라도 주중에 성경 한 줄이라도 읽는 사람이 우리 가톨릭 교우 중에 몇 명이나 될까?


그래도 주말이면 놀 것이 천지인데 이렇게 성당까지 나와 미사참례 하고 성가를 부르고 신부님 강론 한 마디라도 듣는 어린이라면, 예수님께 이쁨 받을 게 틀림없다. 새 신부님이 오시고 나서 주일미사 어린이 숫자가 많이 늘어 한결 기분이 좋다. 어느 신자의 새 주임신부 평: ‘인품도 좋고, 성격도 좋고, 강론도 점잖고, 거기다 목소리마저 좋아 이뻐죽겠어!’ 참 다행이다. 사제 한 분이 본당공동체에 ‘일치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하느님이 모아놓으신 것을 싹 흩어버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보스코는 미사 후 집으로 먼저 가고 나는 시장엘 들렀다. 5m 폭의 시장통이 차 한 대가 겨우 다닐까 말까 좁아졌다, 그것도 행인들 눈치를 받으면서… 가게마다 덤도 주고 깎아도 주고 외상도 주고 공짜로 먹어보라고 쥐어주는 시장이다. 피가 통하고 인간미가 있는 시장통을 동네 토착민들은 모두 사랑한다. 



‘쌍둥이네 닭집’만 해도 아저씨가 장사하다가 지금은 빵고 초딩 동창인 아들이 닭을 튀기고 배달하고, 아줌마는 옆의 건어물집을 인수하여 꾸려가고, 모퉁이는 딸애가 생선을 내놓고 판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보아왔으니 내 눈엔 아직도 기껏해야 ‘큰애기’인데 벌써 세 아이의 엄마에다 마흔이 다 됐단다. 그 집에서 고등어 두 마리와 바지락을 사면서도 기분이 좋다.


떡집도 아저씨는 돌아가시고 아줌마는 다리가 시원찮아 가게에 안 나온 지 오래여서 막내가, 내가 처음 아저씨를 만났던 나이가 되어, 떡방아 기계를 돌리고 있다. 보스코가 좋아하는 인절미를 샀다. ‘기름가게 총각’도 그새 환갑이 넘었고, 동네 초입 슈퍼 아저씨는 허리가 90도 이상으로 휘어졌다. ‘수정여관’ 문패가 사라진 곳엔 밥집이 생겼더니 오늘은 ‘세놓는다’는 푯말이 붙어 있다. 



다리께 ‘잡곡가게’ 맞은편 ‘열쇄수리’는 주인이 바뀌었다. 예전엔 파파할아버지가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를 모셔다 하루 종일 유리문 앞에 앉혀 놓고 작업을 하셨다. 할머니의 현존으로 삶을 부지하셨다는 듯이, 할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돌아가셨다. 아내의 휠체어를 밀고 오가던 금술 좋은 그 부부의 출퇴근 장면, 낮참이면 할아범이 할멈에게 밥을 떠먹이던 아름다운 장면은 더는 못 보게 됐다.


오후에는 날씨도 풀리고 하늘도 맑아 우이천변을 거닐면서 북한산과 도봉산, 개천에 쌍쌍으로 노니는 오리와 원앙과 해오라기가 한가로이 헤엄치는 모습을 감상하였다. 우리 부부가 아직 건강한 몸으로 천변을 한 쌍으로 거니는 일이 예사롭지 않은 큰 행복임을 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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