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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세 끼 먹인다고 다 되는 게 아니고…
  • 전순란
  • 등록 2019-03-22 11:3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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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0일 수요일, 흐림



비가 오겠다는 일기예보와 함께 하늘은 새벽부터 잔뜩 찌푸린 얼굴. ‘이분, 아주 무서운 주먹이셔!’라고 소개받으면 인상을 팍 쓰면서 어깨를 잔뜩 벌려 허세를 과장하는 동네 건달 같다. 그렇게 해님은 종일 얼굴 한번 내 보이지 않고 일몰시간까지 떨어뜨린 게 비 한두 방울이 고작이었다. 일기예보 땜에 밭일도 못하고 마당 화단의 풀도 못 맸다.


덕분에 차분히 집안에서 화분손질을 했다. 보름을 넘게 집을 비운 사이, 아래층 진이엄마가 때맞춰 물을 주어 화초가 말라죽는 건 피했지만, 어린애들이 하루 세끼 먹인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은가! 어미가 있어 챙기고 쓸고 닦아줘야 사람 꼴이 되듯, 꽃들도 안주인의 세심한 손길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 떡잎은 따 주고, 햇볕으로 너무 기운 애들은 화분을 돌려서 다른 쪽도 함께 크도록 돌봐야 한다. 잎이 노래지면 배고프다는 말이니 영양제를 줘야 하는데 ‘실컷 먹어라.’고 양껏 뿌리면 차라리 안 준 것만 못하니 연하게 적당히 줘야 한다.


지난 1월에 꽃대를 밀어올리던 천리향이 대견해서 ‘꽃피우려면 힘들겠구나.’ 싶어 영양제를 주었는데 과했는지 이번에 돌아와 보니 고스란히 말라죽어 있었다. 작년 마당에 큼직한 천리향이 꽃을 피울 적에 잔가지 하나를 꺾어 유리컵에 꽂아 식탁에 올려놓았더니 병속에서 뿌리를 내려 흙에 옮겼었는데… 속이 많이 상했다. 



우리 없는 새에 마당에서도 병든 대추나무가 잘려나가고, 금목서와 한데 붙어서 고생하던 동백이 잘려나갔다. 20년 넘게 자라 아까워서 우리가 차마 손대지 못하던 두 그루를 진이아빠가 과감하게 잘라낸 것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먹여준 대추며 겨울마다 눈발을 이고 피어나던 아름다운 동백꽃들에 감사를…


집안일이라는 게 티는 안 나고 종일해도 끝이 없는 터에 도정 체칠리아가 전화를 했다, 용유 담으로 걸으러 가자고, 소담정 도메니카도 간다고. 마음이야 백번 가고 싶지만 할 일이 천지라 자리를 뜰 처지가 안 되어 ‘갔다오다 휴천재에 들러 차나 하고 가라’ 했더니 ‘밥은 안주나?’ 묻는다. ‘물론 주고말고. 어여 다녀와요.’ 위아래층 청소와 화분정리로 분주한 중에도 점심을 장만했다.


반찬이라야 이 마을 집집마다 밭에 가득한 쪽파 초무침, 브로컬리(어떤 할메가 ‘보리꼬리’라고 해서 웃었다), 시금치, 달래, 무말랭이무침, 알타리, 배추김치, 된장국…. 휴천재 텃밭에서 공짜로 시장을 봐서 마련한 것들이다. ‘남의살’이라곤 고등어구이뿐. 그래도 산행 후여서 체칠리아와 도메니카는 찬 없이도 한 그릇 뚝딱 끝내주었다.


작년에 윤희씨가 쪽파씨를 주었는데 분량이 꽤 된 것을 나 없는 새에 드물댁이 텃밭 남은 자리마다 꽂아놓아 감자와 양파를 빼고는 휴천재 텃밭이 거의 파밭이다. 체칠리아도 양껏 뽑아가고 오후엔 승임씨네도 와서 뽑아가라고 불렀다. 이렇게 푸성귀가 많을 땐 먹어 주는 게 큰 부주다.



승임씨 부부는 방곡 그 넓은 땅을 ‘타샤의 정원’으로 꾸미느라 고생이 많다. 산청 왕산의 특유한 백토와 지난 일 년 내내 씨름하느라 지쳐 있지만, 승임씨는 미술가답게 날마다 다른 색깔로 떠오르는 새벽빛을 화폭에 담느라 가슴 뛰도록 아름답고 행복한 나날을 보낸단다. 꽃을 가꾸면서 시시각각 딴 얼굴로 다가앉는 앞산과 뒷산, 마당에 심어놓은 꽃들이 멋진 폼으로 하루하루가 기적처럼 느껴지는 세월이란다. 맑고 투명한 영을 지닌 두 사람을 보면 우리도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엘리가 손녀딸 백일 사진을 보내왔다. 아기곰보다 더 아기곰 같은 꼬마, 저렇게 무럭무럭 자라주는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또 오늘 수술한 송목사네 갓난아기 ‘믿음이’의 수술이 잘 됐다는 연락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부디 아기곰처럼 찍은 백일사진이 오기를 기도한다. 우리 후배 성애씨도 서방님의 친절한 진료를 받았다는 연락을 해왔다. 혼자된 여인의 기나긴 밤들과 병약한 몸으로 견디는 침상에 주님의 따사로운 손길이 함께하시기를… 지리산의 밤이 깊어지자 빗방울지는 소리가 제법 들린다. 모든 초목이 메말라 있어 참으로 단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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