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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최후의 인간 - [이기상-신의 숨결] 허무주의 시대에 지피는 영성의 불꽃 ①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08-12 12:06:30
  • 수정 2019-08-12 1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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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여 년 전 이미 허무주의 시대를 예언했던 니체


오늘의 주제는 “21세기 영성의 시대를 예비하며. 허무주의 시대에 지피는 영성의 불꽃”이라는 길고 거창한 제목이다. 


먼저 <허무주의>라는 용어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허무주의’ 하면 여러분도 대충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허무주의와 연관되어 떠오르는 철학자가 한 사람 있다. 그 사람은 19세기의 마지막 위대한 근대 철학자인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다. 니체는 1900년에 죽었다. 니체의 죽음과 더불어 근대가 끝났다고 흔히들 말한다. 1900년부터 현대철학은 시작되었다. 바로 이 니체가 죽기 한 10여년 전, 그러니까 1880년 말쯤 해서 허무주의의 도래를 예언했다. 니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200년의 역사이다. 내가 서술하는 것은 도래하는 것, 더 이상 다르게 다가올 수 없는 것, 즉 허무주의의 도래이다. 이 역사는 지금 미리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연성마저도 여기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래는 이미 100개의 징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명은 어디에서나 자신을 예고하고 있다.”


이렇게 니체는 이미 지금부터 110여년 전에 <허무주의의 도래>를 예언했다. 그는 그때 앞으로 전개될 200년의 역사라고 얘기했다. 니체의 이 예언과도 같이 우리 시대는 바로 그 200년 안에 들어 있고 지금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이 허무주의의 망령을 볼 수 있다. 


허무주의, 모든 정신적 가치를 부정하는 주장



허무주의는 독일어 Nihilismus로 표기되는데 어떤 경우 번역을 하지 않고 니힐리즘이라고도 부른다. Nihil은 라틴어로서 <아무것도 없음>, <무(無)>를 뜻한다. 허무주의는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다’,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극단적인 의미 부재를 주장하는 철학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의미나 목적이나 목표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 인간의 정신적인 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진리, 도덕, 윤리, 종교마저도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정신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주장이다. 


그러면 이러한 주장이 말하는 것과 그 주장에서 귀결되어 나오는 것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이미 말했듯이 첫 번째는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다,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이란 없다’고 하는 주장이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다. 다음, 진리와 관련하여 ‘진리도 없다’고 얘기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 그것은 알고 보면 거짓이고, 속임수고 눈가리개일 뿐이다. 뭔가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획득하기 위해 진리라는 포장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 도덕도 윤리도 없다. ‘도덕, 윤리도 강한 자들이 약자들을 쉽게 지배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수준 높은 통치수단일 뿐이다’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 다음, 종교도 없다. ‘종교라는 것도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민중들을 호리는 환각제일 뿐’이다. 그 귀결은 “신은 죽었다”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라는 것은 죽은 신의 무덤 위에 지은 건축물일 뿐이다. 


따라서 정신적인 가치란 없다. 정신적인 가치라는 것도 육체적인 욕망을 다스리고 인간의 노동력을 극대화시켜 이용하려고 만들어낸 허구이며 지배계층의 술수다. 곧 육체적인 욕망에 대한 왜곡된 시련이다. 육체적인 욕망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정신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으로 육체적인 욕망억제에 대한 보상감을 주는 대리만족 장치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현존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살고자 하는 <의욕>뿐이다. 


그러니까 육체적 욕망의 극대화, 이것이 허무주의를 살아가는 삶의 요령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추구해야 할 것은 최대의 쾌락이며 그것이 곧 최대의 행복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등장되는 말들은 쾌락, 도취, 희열, 열광, 올가즘, 엑스타지, 니르바나, 트랑스, 광기, 폭력, 마약, 온갖 중독 등이다. 최대의 쾌락을 누리는 것, 그것이 최고로 행복한 상태이고, 몸을 중심으로 하여 얻을 수 있는 온갖 쾌락, 그것이 바로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의미의 물음이나 이성적인 돌파구를 찾는다고 할 때 해결책은 딱 한 가지, 즉 자살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노력한다면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다. 합리적으로 의미 있게 모든 일을 처리하기를 바란다면 길은 오직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의미 없는 모든 것들로부터 <의미 있게>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죽음의 미학, 자살의 미학이 태동되어 나온다. 유명한 실존철학자 까뮈도 이렇게 얘기했다. 부조리한 삶, 그것에 대한 철학적인 귀결은 자살이라고. 부조리한 삶에 이성적인 반성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해결 방식은 자살뿐이다. 


이상이 허무주의 용어에 대한 설명이다. 이제 허무주의가 과연 우리사회, 우리 세상에 어떤 식으로 만연되어 있는지를 몇 가지 특징적인 현상들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최근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자살사이트’라는 것이 있다. 유행하는 유머를 살펴보면 그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다. 한때는 엽기유머가 유행하더니 요즘은 허무유머가 유행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우리사회도 이제 서구화되어 근대화의 마지막 현상이라 할 수 있는 허무주의 현상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몇 가지 영화를 통해서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의 삶의 양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등을 살펴보도록 하자. 


허무주의 현상, 폭력·자살·광기·마약·온갖 중독


독일영화 중 1980년대 초 물의를 일으킨 영화 <베를린 동물원 역(Christiane F. - Wir Kinder vom Bahnhof Zoo)>이라는 것이 있다. 이 영화는 13살짜리 마약중독 소녀의 이야기다. 13살짜리 어린 한 소녀가 다 자라기도 전에 마약중독에 빠져서 인생을 무의미 속에 죽이고 있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허무주의가 만연되기 시작하면 육체적인 쾌락을 찾고 그것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마약이 판을 친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독일의 가장 큰 사회문제 중 하나가 바로 마약이었다. 많은 청소년들이 마약중독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죽어가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정부가 대책마련에 부심하였다. 마약대책 위원회의 프로젝트 중 하나는, 마약의 문제가 전혀 없는 사회가 어느 곳이며 왜 그곳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는지를 연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때 마약 청정 지대로 한국과 일본이 꼽혔다고 한다. 특히 한국은 그 당시 마약으로 죽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이제는 한국도 국제마약상들의 판매 경유지가 되었고 마약 판매가 주택가의 주부들에게까지 미치는 정도가 되었다. 


이렇듯 허무주의 현상 중 두드러지는 것 하나가 바로 마약이다. 마약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즉각적인 쾌락이다. 사랑도 섹스도 나름대로 일정한 인간관계를 전제로 해서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 인간관계에서의 노력이 허무주의자에게는 귀찮고 짜증스러운 것이다. 현대인들은 마약을 노력 없이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라는 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한 알코올 중독자의 이야기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나오는데,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현금으로 바꾸어 그 돈으로 라스베가스로 와서 그곳에서 마음대로 실컷 술을 마시다가 죽으려고 한다. 삶의 목적이란 없다. 단 한 가지 진탕 술을 마시고 죽는 것이다. 일종의 알코올을 통한 자살이다. 


이 두 가지, 의미가 없는데 의미 없는 삶의 돌파구로 삼은 마약과 술의 끝은 죽음뿐이다. 언제든지 찾아 올 수 있는 그 죽음이 빠르든 늦든 상관없다. 그 죽음까지의 기간을 그냥 기다리기보다 마약이나 알코올에 찌들어 자기 자신을 불태워 버리는 삶을 택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의미부재의 삶을 살아나가는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허무주의의 시대에는 죽음, 폭력, 자살, 광기, 마약, 온갖 중독이 난무한다. 삶의 절대적 가치와 중심이 사라진 이 시대에서 각자는 자기가 알아서 자기의 삶의 목적을 찾아 설정해야 한다. 어디서 그 삶의 목적을 찾아야 하는지, 그것이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가장 난감한 문제다. 의미 있는 것이란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의미 있다고 생각되던 예전의 가치관, 가족, 친구, 우정, 사랑이라는 그 모든 것도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각자가 알아서 의미 있는 삶을 설계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그 방법을 모른다. 


허무주의 시대를 살아갈 방법을 배우지 못한 ‘최후의 인간’


<푸줏간 소년(The Butcher Boy)>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서도 소년이 살아 나가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정적인 유대가 없다. 가정이나 학교, 또는 동네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라든가, 친구와의 우정이란 것이 없다. 그 소년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기 전 단 한사람의 친구라 믿고 있던 소년을 찾아 나선다. 그 소년이 묵고 있는 기숙사로 찾아가 우정을 확인하려 하지만 친구라고 믿었던 소년은 그것을 거절하고 부인한다. 마지막 삶의 희망으로 잡고 있던 한 가닥 끈마저 끊긴 소년은 그 뒤로 인간이기를 거부한다.


이 소년은 허무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의미 없고, 목적 없고, 가치 없는 이러한 허무주의 시대에 인간들이 취하는 태도는 소유, 욕망이다. 내가 가진 것 그것만은 믿을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으니, 내가 갖고 싶은 그것을 얻는 것이 유일한 가치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오로지 소유와 욕망에 의해 꾸려져 나가는 현실, 거기에는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내 눈으로 확인 할 수 없고 내 감각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오로지 소유, 욕망, 감각에 빠져 사는 삶의 모습을 니체라는 철학자가 이미 예언하였다. 허무주의 시대의 인간들을 니체는 <최후의 인간> 또는 <마지막 인간>이라 하였다.


최후의 인간, 우리는 정말 행복을 발견한 것일까.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라는 니체보다 조금 뒤의 사람은 니체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렇게 말한다. “엄청난 문화발전의 최종단계에 기계화된 화석인간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화석인간은 정신이 없고 감정이 없는 육욕주의자이다.” 베버는 인류문명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정신이 없는 전문가, 감정이 없는 육욕주의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우리는 이런 기계화된 인간을 사방에서 볼 수 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 좋아하는 사람이나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터미네이터와 로보캅이라고 많은 어린이들이 대답했다고 한다. 바로 정신이 없고 감정이 없는 기계화된 인간이다. 21세기 우리는 사이보그 시대의 문턱에 와 있다.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 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은 더 이상 가난하게 되지도 않거니와 부유하게 되지도 않는다. 이것도 저것도 다 너무나 거추장스럽다. 누가 여전히 지배하려고 하는가 누가 여전히 복종하려고 하는가 이것도 저것도 다 너무나 귀찮다. 목자 없는 양떼! 모두 똑같은 것을 원하며 모두 다 똑같다. 다르게 느끼는 사람은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간다. 인간은 영리하여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다. 대낮에는 대낮의 기쁨을 누리고, 밤이면 밤대로의 재미를 보지만, 건강에도 아무쪼록 유의를 한다. <우리들은 행복을 발견하였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끔뻑거린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라는 작품에서 이러한 감정이 없는 육욕주의자들을 그리고 있다.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바로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행복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행복하다’를 외치며 그러한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 사회도 이제 그 비슷한 길로 접어들었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소위 가치 있는 것들로 돈, 건강, 외적인 미, 쾌락, 정력을 얘기하고 있다. 성형외과를 찾아 외모를 고치고, 다이어트가 인기 있고, 비싼 화장품이 잘 팔리는 등 오직 외적인 것에만 신경을 쓰며 외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마치 누군가에게 잡혀 먹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니체의 최후의 인간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 다음 편에서는 ‘허무주의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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