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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 [이기상-신의 숨결] 허무주의 시대에 지피는 영성의 불꽃 ②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08-19 11:22:31
  • 수정 2019-08-19 11:4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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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


허무주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신의 죽음 선포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니체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것을 너희에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는 모두 신을 죽인 살인자들이다!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어떻게 바닷물을 다 마셔 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로 움직여 가고 있는가? 우리는 무한한 무에 의해 길을 잘못 들지 않았는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었다! 모든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까? 이 위대한 행위는 우리에게 너무나 위대한 것이 아닌가? 그 품위에 걸맞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신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보다 더 위대한 역사에 속한다.” 


허무주의는 사실 서서히 보이지 않는 마수를 오래전부터 뻗쳐왔다. 허무주의의 마수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신을 쫓아내야 했다. 신을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쫓아내야 한다. 니체는 근대 말미 마지막 철학자다. 근대의 전 과정이 이미 신을 서서히 목 조르면서 죽여 온 역사적인 과정이었다. 어쩌면 중세 때 이미 신을 위한 교수대(단두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 존재를 증명하는 길과 신에 이르는 길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 존재 증명을 위한 다섯 가지 길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때 그는 이미 다섯 개 신의 관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신 존재 증명을 위한 다섯 가지 길, 그것은 역으로 만약 그 다섯 가지 길이 잘못된 길이든지 그 길로써 신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어쩌면 그가 준비한 것도 그것이다. 다섯 가지 길, 이제 그렇게는 신 존재 증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토마스 아퀴나스 자신도 말년에 자신이 신에 대해 쓴 그 모든 것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개탄했다. 신과의 합일이라는 영성적 체험을 한 뒤 그는 평생 학자로서의 자신의 모든 노력이 헛되었음을 고백했다. 바로 이렇게 중세 자체가 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이성적인, 합리적인 길만을 생각했다. 즉 오직 이성적인 길, 합리적인 길, 논리적인 길, 계산의 길로만 신에게 이를 수 있다고 여겼다.


중세 자체가 소위 말하는 앎과 믿음, 그 둘을 결합시킨다고 하면서 모든 믿음을 합리화시키려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실이 근대에 꽃피게 되고 그것은 결국 신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합리화시킬 수 있는 믿음만을 믿음이라 본 것, 이 머리·두뇌·이성으로만 하느님을 접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고 본 것, 그것이 바로 신에게로 가는 참된 길을 차단해 버린 셈이 되었다. 신에 이르는 다른 모든 길들을 다 배제하였기 때문에 그 길만을 따라갔는데, 그 길의 끝에 신은 없었고 고무풍선처럼 부푼 인간의 욕망과 오기만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종지부, 그 이후 신의 자리에 들어선 인간


근대의 대표철학자인 칸트는 그러한 신 존재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이로써 신에 대한 논의가 학술적인 차원, 즉 이성적인 차원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칸트의 책 『순수 이성 비판』에서 그는 신의 존재는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입증하였다. 우리는 소리(음향)의 존재를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하여 소리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다. 신 존재는 인간의 감각적인 차원으로도 인간의 이성적인 차원으로도 이를 수 없다. 칸트가 바로 이런 식으로 이성으로는 신을 증명할 수 없다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바람에 이제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미 신은 오래 전부터 생활과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칸트의 이러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종지부, 그것을 독일의 문학가인 하이네는 이렇게 비유한다. 프랑스인들은 왕의 머리 하나를 쳤지만 칸트는 하느님과 그의 천사들을 단두대로 보냈다. 그 이후 신의 존재는 증명이 안 된 채 하늘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 정도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의 신 존재 증명의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 이후 신이 서서히 죽어 온 것, 그래서 삶 속에서 쫓겨 난 것, 그리고 그 신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서 그 자리를 차지한 것, 이것이 근대의 근대화 과정이다. 


▲ 영화 <인류멸망보고서> 중 ‘천상의 피조물’


이성 중심-존재자 중심-인간 중심-서양 중심, 신 죽임의 과정


그래서 요즈음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하며 탈근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근대화가 가졌었던 이성 중심(로고스 중심)의 태도다. 순전한 합리화 과정, 머리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냉철한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이성 중심,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 중심의 경향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또한 존재자 중심, 더 나아가 서양 중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서구의 근대화, 그것은 한마디로 신 내지는 성스러운 것, 신적인 것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부터 쫓아낸 뒤 가능했다. 그러니까 근대화의 과정, 그것은 곧 세속화의 과정이었고 신 죽임의 과정이었다. 이것에 대해 근대의 마지막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것이다. 


허무주의의 뿌리! 그것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많은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 가운데 이성적인 능력만을 극대화 시켜서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존재만을 유일한 것으로 봤고 그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본 데에 있다. 한마디로 존재자 중심이고 그 안에 들어오지 않은 모든 것은 없애버린 <무 제거의 역사>라 볼 수 있다. 그 무가 이제 망령처럼,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맴돌며 우리 자신을 괴롭힌다. 그것이 바로 허무주의이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 있다면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 다음 편에서는 ‘허무주의 극복’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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