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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 놓여있는 인류,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 [이기상-신의 숨결] 허무주의 시대에 지피는 영성의 불꽃 ③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08-26 11:01:39
  • 수정 2019-08-26 11: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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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 극복을 위한 노력


‘허무주의 시대에 지피는 영성의 불꽃’이라는 제목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영성을 제안한다. ‘영성’이라고 말하면 벌써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영성으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많은 세계적인 지성인들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제 인간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재고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기술과 과학이 극에 이른 현대가 과연 인류에게 행복을 약속해 주고 있는가? 인류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있는가? 오히려 기술 문명의 최고점에 올라선 현대에 인간은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오히려 자살을 생각한다. 아니러니 하게도 잘 산다는 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다. 그것은, 인간은 빵이 아무리 많아도 의미가 없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비록 자살을 택하지 않더라도 마약, 알코올, 순간적인 쾌락을 쫓아 순간순간을 죽여 가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서구 문명이 정신적인 것을 몰아내고 오로지 물질적인 것만을, 돈, 쾌락, 욕망, 소유, 소비 등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인 추세다. 


21세기는 새로운 종교성의 시대가 되어야


위대한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럽문명에 커다란 약점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지금 세계를 정복한 듯 보이는 유럽문명은 그 힘을 오직 물질 문명적 측면에서만 길어내고 있다고 말한다. 단지 과학기술로 전 세계의 물질적인 면만을 장악하고 있을 뿐, 거기에는 정신적인 원리가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이 정신적인 원리의 결여, 그것이 큰 공백을 만들고 있고 그 공백이 <무>라는 망령으로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 무의 망령을 퇴치하기 위해서 우리가 쫓아 낸 신적인 것, 성스러운 것, 이것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능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태까지 인간은 이성적인 능력, 그 중에서도 계산해 내는 능력, 셈할 수 있는 능력,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 그래서 눈앞에 세우고 그것을 조종하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 내 것으로 만들어 쾌락을 도모할 수 있는 능력, 이러한 물질적인 것, 존재자적인 차원만을 극대화 시켰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다른 능력도 있다. 그 다른 능력이 바로 영성, 이성에 반대급부인 또는 이성적인 차원이 접근할 수 없다고 하여 외면하였던 다른 차원으로서의 영성적인 차원이다. 토인비는 21세기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 새로운 종교성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탈근대를 주장하면서 이성이 아닌 다른 것, 우리가 이성적이 아니라 해서 외면했던 것들을 다시 부각시켜 보자는 추세로 가고 있다. 이성이 아닌 다른 것, 그것은 광기, 폭력, 섹스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이것들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고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이성이 아닌 다른 것’으로서의 이러한 것들도 전부가 아니다. 이성적인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이 있다. 그것은 예컨대 종교적, 도덕적, 예술적인 현실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하여 서서히 하나씩 배제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 도덕, 예술적인 현실에로의 접근을 가로막았던 인간의 잘못된 태도는 무엇보다도 무, 공, 허 그래서 없다고 배제한 현실 영역에 대한 잘못된 관계맺음이다. 이제 우리가 무․공․허, 그래서 없다고 생각한 그것, 그 없는 것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을 새삼 새롭게 인정하고 거기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럴 경우 우리가 간과했던 새로운 현실이 열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주어질 것이다.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갈 문법을 찾아라


바로 이 점에서 동양 사람들, 특히 한국 사람들이 이제 숨겨진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서양은 이성 중심적 추세로 발달되어 왔고 그래서 서양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성적인 능력이 극도로 발달되었다. 이에 비해 동양 사람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이성적인 능력이 서양사람 만큼 잘 발달하지 못했다. 서양은 근대화를 거치면서 모든 것이 모든 면에서 합리적이 되었고, 서양사람들은 이제 그렇게 합리적으로 된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 살기 싫다며 유리병을 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지난 반만년의 역사 그리고 근대화가 시작된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양사람처럼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았다. 우리의 생활이, 생활세계가 유리그릇처럼 투명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지금 온통 부정부패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이성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한국은 모든 면에서 실패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인류가 이성이 아닌 다른 차원을 찾으며 그래서 영성적인 차원을 찾아야 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기 때문에, 서양사람들이 갖지 못한 새로운 능력으로 한국사람들이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말,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흔히 3F 시대를 이야기한다. 이 3F란 Feeling, Female, Fiction, 즉 감성, 여성, 가상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감각, 여성이 강조된다고 한다면 근대화가 이룩해 놓은 이성중심, 인간중심, 서양중심, 남성중심의 경향에서 벗어나 이제 감각에도 기회를 주고, 여성적인 차원도 키우며 더 나아가 영성적인 차원도 키워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서양 사람들이 자기들 것만이 절대라고 생각한 ‘절대중심’에 의해서 그 중심에 끼지 못한 주변이 소외되었는데, 이 절대중심이 무너지면서 이제 다중심시대인 다원주의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다원주의시대를 살아갈 삶의 문법을 찾아라! 이것이 현대인들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한스 큉은 이 점을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는 말로 표현했다. 서양 중심 속에서는 유일한 종교인 기독교에 의한 세계 구원만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되었다. 이제는 그런 잘못된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도 종교들 간의 평화, 관용 그리고 상호 인정이 필요한 시대다. 평화를 외치는 종교가 평화를 막는 장애요인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서구적 영성이 아니라 새로운 영성을 찾아


마더 데레사는 “나눔 없이 평화 없다”고 하였다. 소유, 소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삶의 방식을 바꿔 이제부터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고 우리 자신까지도 남과 나누는 나눔과 비움의 생활을 실천해야 이 세상에서의 평화가 실현된다고 말하며 실천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마더 데레사의 영성적인 태도를 배워 생활화해야 한다. 새로운 영성을 찾으라고 하는 시대적인 분위기와 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한다. 


서양에서는 <첸(Zen, 禪)>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힐링 소사이어티』의 저자는 미국에서 선을 가르치는 학원을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과학과 기술에 찌들어 그 반대급부로 첸(선)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서구의 과학을 쫓고 있고 그들은 동양적인 것을 선호하여 첸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 새로운 차원에서 인류가 놓여 있는 위기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 오른쪽 위 시계방향으로 간디, 마더 데레사, 류영모, 한스 큉


이러한 새로운 영성을 강조한 서양 사람들로는 토인비, 하이데거, 칼 라너, 한스 큉, 카프라, 하비 콕스 등이 있고, 동양 사람으로는 마더 데레사, 간디, 한국 사람으로서는 류영모, 김지하 등이 있다. 하이데거는 말년에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성과 우리가 생각하는 영성은 그 차원이 다르다. 


예를 들어 하비 콕스가 생각하는 영성을 보면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1960년대 『세속도시』라는 책을 출간하여 대단한 물의를 일으켰던 사람이다. 그가 90년대에 새로운 책을 썼는데 『영성·음악·여성· 21세기 종교와 성령운동』이었다. 여기서 그는 영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로고스(이성) 중심적으로 논의를 전개시켰다. 그것이 바로 서양사람들의 한계다. 그들은 영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이성적으로 로고스 중심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 한다. 바로 이 책에서는 인간의 원초적인 영성에 근거한 세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본다. 


즉, 방언기도와 같은 원초적 언어, 이적과 기적에 근거한 원초적 신앙심, 그리고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현존적 미래를 바라보는 원초적 희망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로고스, 즉 이성, 언어(말)이다. 이러한 이성적인 차원의 영성만 가지고는 희망이 없다. 국내에서 많이 하고 있는 성령운동, 신앙부흥회라는 것을 보자. 그것은 거의 개신교의 것이고 대다수 미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그것은 한결같이 언어중심, 로고스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방언이나 큰 소리로 기도하고 울부짖는 이 모든 것은 소란 속에서 말짱한 혼을 빼앗아 뭔가 영성적인 차원에 도달하려 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서구적 영성이고 여기에는 영성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차원이 간과되고 있다. 


갈림길에 놓여있는 인류,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래서 칼 라너(Karl Rahner)가 한국교회에 기대하며 희망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980년대 뮌헨 가톨릭 한인회의 초청으로 행한 강연에서 그는 20세기말, 21세기에 기독교, 가톨릭은 동양의 명상, 영성, 선, 침묵에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로고스중심, 이성중심, 언어중심이 그 로고스를 더 극단으로 몰고 가 트랑스(초월) 상태에 도달하려 해서는 안 되고, 이제 인류가 시도해 보아야 할 것은 그 반대급부인 <침묵>이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도 영성의 첫 단계로 침묵을 강조하고 있다.


학문적으로 볼 때 인류(인간)의 출현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진화의 역사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다. 인간은 우주진화의 꽃이다. 인간 속에 우주진화의 전 역사가 담겨(각인되어) 있다. 또 전체 인류의 역사는 인간 개개인의 발달, 성장 속에 각인 되어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먹고 자라며 배우고 꿈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려 버둥대다가 죽음에 이르는 이 개인 삶의 과정 속에는 200만년에 이르는 인류역사가 녹아있다. 


예를 들어 만 년 전의 인류의 삶은 어린아이들의 삶에 비유할 수 있고, 그 당시는 씨족 또는 부족의 우두머리가 절대적이었다. 오천년 전에는 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신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질서 잡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과정은 유아시절이라 할 수 있다. 근대는 의심과 비판의 정신이 불타오르는 사춘기라 할 수 있다. 현대는 아마도 40대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혹의 나이인 40대에 인간은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신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이성으로 이루어놓은 이 많은 것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 하다. 


그런데 50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인류는 갈림길에 놓여 있다. 인류는 지금 자기가 이루어놓은 것에 도취되어 건강이나 미용, 문화생활에 눈을 돌리며 이제 좀 즐겨보자고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또는 이와는 다르게 그 동안 자기가 잊고 지냈던 다른 차원, 즉 신적인 것, 성스러운 것 등 영성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과 나 자신, 내 가족, 내나라, 지구 등을 벗어나 우주적인 차원의 나를 생각하는 지천명의 나이인 50대가 있을 수 있다. 


▲ 다큐멘터리 <영혼의 순례길> 스틸컷


인류는 지천명의 나이로 들어서느냐 아니면 쾌락과 안위만을 쫓아 모든 것을 즐기며 사는 허무주의에 머무느냐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 인류의 역사가 각인 될 그 삶을 개체가 50대의 영성적인 삶으로 채울 것이냐, 아니면 그것과는 다른 것, 즉 무한경쟁, 무한소비, 무한쾌락의 삶으로 각인할 것이냐에 따라 미래의 인류 역사는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영성적인 차원, 즉 무․공․허에 마음을 열며 살았던 한국인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한국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눈을 크게 뜨고 우리자신을 되돌아보고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의식한 시인 김지하의 시 <나이>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이 먹는 것

차츰 쓸쓸해지는 것

혼자서 우주만큼 커져

삼라만상과 노닐도록

이승에선 그렇게 외로워지는 것.”

(김지하, <나이>, 『중심의 괴로움』)


▶ 다음 편에서는 ‘마더 데레사의 영성’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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