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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 앎과 모름을 넘어 하나로 통하는 길
  • 이기상
  • 등록 2020-02-03 11:00:33
  • 수정 2020-02-03 17:4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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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은 우주의 텅빔이며 우주의 마음이다. ⇒ 하나님


하나이며 전체로서의 하느님을 우리는 ‘하나님’이라 이름한다. 우주란(宇宙卵)[대폭발(Big Bang)]이 생기기 전의 절대허공, 태극 이전의 무극을 상정하여 보자. 태극이 전개될 수 있는 가이 없는 절대공의 상태 내지는 마당, 아직 아무런 존재자도 등장하지 않은 텅 비어 있음, 빈탕한데, 무엇으로도 막혀 있지 않은 확 트여 있음,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절대 가능성의 상태가 태극 이전의 무극이다. 논리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내용도 품고 있지 않은 순전한 형식이다. 근본구조를 위한 바탕이다. 아직 아무런 갈라짐과 나뉨이 없기에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로서 단일하고 온전하며 전체다. 그야말로 없음 그 자체이며 거룩함 그 자체이다. 


▲ Mark Rothko < Rothko Chapel >


이 온통 ‘하나[님]’는, 태극의 유래로서의 무극, 있음의 유래로서의 텅빔(없음)을 바탕으로 하여 그 안에서 전개되는 모든 있음의 사건까지도 포함한 하나이며 온전한 전체를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가 거기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절대적 원천으로서의 ‘한·’[한아]이다. 그리고 또한 모든 개체로서의 ‘제나’[제 각기의 나]들을 다 자기 안에 안고 있는 큰 나로서의 ‘한 나[大我]’이다. 다석은 “단 하나밖에 없는 온통 하나(전체)는 허공”이라고 말한다. 존재자들이 넘쳐나는 물질계는 색계이며, 이 색계는 환상이라고 한다. 


“나는 단일 허공을 확실히 느끼는데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느껴진다. 단일 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끌과 같이 섞여 있다. 색계에 만족을 느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을 찾을 생각도 못한다.” 


다석은 청정하고 거룩한 허공인 절대공(絶大空)이 생명의 근원이고 일체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온통 하나로서의 허공은 그저 허공이 아니라 중심은 있으되 가장자리가 없는 공[球]과 같은 무한한 허공이다. 이 무한한 텅빔[빈탕한데]에 유한우주가 담겨 있다. 그래서 이 허공을 무한우주라고 말할 수 있다. 천체(별)로 이루어진 유한우주가 팽창하자면 그것을 담고 있는 무한우주가 있어야 한다. 이 무한우주인 허공을 노자는 무극(無極)이라, 허극(虛極)이라고 하였다. 


다석은 텅빔이 참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깊이 생각해볼 때,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허공뿐이다. 모든 천체 만물은 허공 속에 날아다니는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텅빔이 “천체와 만물을 창조하고 지양한다.” 다석은 우주를 담고 있는 무한 허공을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느님의 마음인 허공은 둘레가 없는 공이라 끝이 없다. 웅대하고 장엄한 빈탕한데에 일천억의 태양별을 지닌 은하우주가 일천억을 넘는다. 별을 없애고 본 무한 허공이 무극이고, 일체의 별이 다 담겨 있는 무한 허공이 태극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인 이 허공이 우리 맘속에 한없는 얼을 주니 그것은 또한 영극(靈極)이다. 성령의 영극, 허공의 무극, 천체의 태극을 다 합한 것이 곧 ‘하나님’이다.


2) 하느님은 존재의 사건이다. ⇒ 하늘님, 한울님


무한우주를 담고 있는 하느님의 마음으로서의 텅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비롯으로서의 ‘한·[한아]’, 전체와 절대의 유일존재로서의 ‘하나’를 우리는 ‘하나님’이라 이름하였다. 다른 한편 우리는 생성과 소멸, 변화와 진화가 일어나고 있는 유한우주에서 그런 사건을 주재하는 신으로서의 하느님을 생각하였다. 별무리가 가득한, 끝을 알 수 없는 저 푸른 하늘을 본으로 삼아 신을 상정하였다. 거기에서 유래한 말이 우리말의 ‘하느님’이다. 이 말의 뿌리로서의 ‘하늘[한늘]님’은 무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생성·소멸·변화되는 모든 것을 포함한 절대존재로서의 하느님을 뜻한다. ‘한’은 무한 공간을 의미하며 ‘늘’은 무한 시간을 의미하니 그 둘이 합쳐진 ‘한늘’ 또는 그 변형태인 ‘하늘’은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을 포함하는 절대존재로서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시간적·공간적 사건들을 포함한 절대존재를 지칭한다.


위에서는 강조점이 있음의 유래로서의 없음에 놓여 있었다면, 여기서는 그 절대공의 없음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지고 있는 모든 존재사건을 통틀어 가리키고 있다.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 안에서 벌어졌고 벌어지며 벌어질 그 모든 있음들을 간직하고 있는 절대존재로서의 하느님이 간직하고 있는 상대존재로서의 무한한 개체들을 그 상호관계에서 고찰하는 것이 여기에서의 시각이다. 없음의 무한 허공에 있음의 지평(돔)들이 끊임없이 세워지고 넓어지고 사라져 없어지며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잇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 놓여 있는 한 점 끄트머리[긋, 점, 첨단]일 뿐이다. 그것은 다시 자신의 유래인 절대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해 무극인 텅빔이 그릇으로서의 바탕, 마당이라면, 그러한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 안에서 전개되는 생성·소멸·변화의 모든 존재사건들은 그 무한한 그릇을 잠시 채우다가 사라져 가는 내용물들이다. 하늘님은 텅빔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주재하므로 거룩하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실체인 무(無)와 양태인 유(有)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무와 유, 바꾸어 말하면 공(空)과 색(色)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는 자꾸만 바뀐다. 무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체인 하나님으로는 바뀌면서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 무와 변하는 유의 양면을 가졌기에 전체로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서 변한다.”


무(無)는 변하지 않는데 유(有)는 변한다. 우리는 지금 변하는 유가 되어 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무를 그리워한다. 무가 유의 밑동이기 때문이다. 상대적 존재란 있어도 없는 것이지만 전체인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사명)이 있어 존재의 값어치를 얻게 된다. 우리는 나 자신이 상대적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적 존재는 낱 수가 많은 작은 것들로서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 존재는 모든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로서, 유일 절대의 존재로서 없이 있어 비롯도 마침도 없다. 한마디로 상대적 존재인 개체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이고 절대적 존재인 전체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그러나 개체인 우리는 하나이며 전체인 하느님을 잃어버렸다. 개체가 할 일은 이 하나[전체]로 돌아가 하나[전체]를 회복하는 것이다. 개체의 참 생명은 하나[전체]이기 때문이다. 하나[전체]를 회복하고 하나[전체]로 복귀하는 것이 영원한 삶에 드는 것이요, 참된 삶을 이루는 것이다. 


3) 하느님은 우주의 얼이다. ⇒ 한얼님


창조·생성·변화·진화·소멸 등의 존재사건이 벌어지는 유한우주의 존재사건들은 무한우주인 텅빔[빈탕한데]에서 펼쳐지고 있다. 별별 짓을 다 받아주는 것이 마음이고 온갖 일이 다 벌어지는 데가 빈탕한데이기 때문에, 다석은 마음과 허공이 하나라고 보았다. 그래서 텅빔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혼돈과 혼란 속에서 아무런 법과 원칙 없이 펼쳐지는 듯한 우주의 존재사건이 그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보이지 않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 나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뜻의 차원에서 우주에서의 변화의 흐름을 보고 그것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섭리임을 알아보며 그런 하느님을 이름한 것이 ‘한얼님’이다. 


한얼님은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을 채우고 있는 신령한 힘을 말한다. 우리는 이를 절대생명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사람은 얼의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생명인 한얼과 소통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이 얼의 존재임을 잊어버리고 육신에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 스스로가 우주의 얼인 한얼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 Albrecht Durer < Father`s robe God >


한얼은 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성스러운 존재다. ‘성스러움’, ‘거룩함’은 한마디로 ‘없이 계심’이다. 인간이 이 ‘없이 계심’에 가까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에게 더 이상 ‘성스러움’도, ‘신적인 것’도, ‘신성’도 없어져버린 것이다. 우리가 이 ‘없이 계심’을 볼 수 있는 시야를 되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떠나버린 신의 도래를 기대할 수 없다. 이 거룩함은 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도 볼 수 없다. 오직 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인간이 얼의 존재[얼나=얼의 나]로 솟나야만 그 성스러움을 맞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성스러움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이 없다면 어때,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자는 것이다.”


다석은 “참이신 하느님은 없는 것 같다. 없는 것 같은 것이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얼로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가득하다.”고 말한다. 다석은 우리가 코로 쉬며 연명하는 목숨은 참 생명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면 코로 숨쉬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얼숨이 있다. 숨 안 쉬면 끊어지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말숨(말씀)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하느님이 보내는 성령이 얼나인 참나다. 석가의 법심, 예수의 하느님 아들은 같은 얼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4) 하느님은 우주의 생명, 우주의 진화다. ⇒ 한얼님, 한울님


우주의 텅빔 속에 신령한 힘으로 고루 퍼져 있어 우주 안에서의 모든 존재자가 하느님의 뜻대로 생성·변화·소멸하도록 이끄는 한얼로 인해 우주는 살아있는 우주생명이 된다. 이 전체로서의 우주생명은 살다가 나중에 죽어서 없어지는 상대생명인 낱생명과는 달리 죽지 않고 영원히 계속 사는 절대생명이다. 우리말 ‘생명(生命)’이라는 말 속에 이미 ‘천명(天命)’, 곧 ‘하늘의 뜻’, ‘웋일름’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우주를 생명으로서 고찰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에 따른 우주의 변화, 우주의 진화를 읽어낸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을 우리는 ‘한얼님’, ‘한울님’이라고 이름하였다.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낱생명은 참생명이 아니다. 낱생명들은 나서 살다가 죽어 없어지는 나들이와 죽살이를 거듭하는 상대적 존재로서 상대생명일 뿐이다. 참생명은 이 모든 상대생명을 감싸면서 그것들을 살게 하고 있는 절대생명으로서 얼생명이다. 우주생명으로서의 이 얼생명은 텅빔 또는 빈탕한데로서 하늘이며 한얼이다. 모든 낱생명들은 자신들의 생명의 몸집을 태우는 번제를 통해 우주생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데 동참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생명에서 몸의 차원과 마음의 차원만이 아니라 얼의 차원도 있음을 깨닫고 있다. 얼생명으로서의 인간의 얼나[얼의 나]는 우주생명인 한얼과 하나이다. 가짜생명인 몸나[몸의 나]에 매달리지 않고 이 몸나를 끝까지 깨고 참생명인 얼나로서 솟날 때 사람은 한얼과 하나 되어 하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다. 


다석은 성령의 바람을 범신(汎神)으로 보고 범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운동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으로 정신적인 숨쉼을 한다. 성령이 바로 우리 맘의 얼이며 참나다. 다석은 성령과 통하는 사람은 모든 생명에서 하느님의 마루[뜻]를 읽어내고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여 말로 세워[말슴] 말로 쓰면서[말씀] 하느님의 소식을 전해주며 말숨을 쉬는 말씀[말숨]살이를 산다고 말한다. 


다석은 우주적 생명을 이어받아 지금 여기 살고 있는 낱생명으로서의 나를 ‘긋’이라 즐겨 표현한다. 광대한 우주생명의 역사의 흐름 속에 하나의 점에 불과한 나지만 내 안에 불타는 하늘의 일름[명(命)]을 깨달을 때 나는 하늘과 하나 되어 생명의 역사를 함께 써가는 얼나로 솟날 수 있다. 이렇게 몸생명을 깨끗이 끝내고 참생명의 역사에 동참하는 몸나로서의 나의 결단을 다석은 ‘가온찍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민족의 한 끄트머리 현대에 나타난 하나의 첨단이다. 나의 정신은 내가 깨어나는 순간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에 긋을 찍는다. 가온찍기(「·」)이다. 이 한 긋(點)이 나다. 나는 한 끄트머리이며 하나의 점이며 긋수이기도 하다.”


다석의 제자 함석헌은 우주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보고 그것이 곧 진화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함석헌은 역사는 결국 생명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국민의 역사이거나 인류의 역사이거나 문화의 역사이거나 천연의 역사[박물(博物)]거나 구경에 있어서는 이 대우주를 꿰뚫고 흐르는 대생명의 역사”라고 말한다. 함석헌은 또한 진화를 진보로 받아들인다. 물질은 생명을 향해, 생명은 의식을 향해 그리고 의식은 양심을 향해 나아온 것이 진화의 역사이다. 그는 지금까지 우주의 역사가 진화를 거듭하여 발전해 왔듯이 인간 역시 진화를 거듭하여 더 고차원적인 존재 곧 영적 생명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진화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믿음”(16)을 보았던 것이다.(17)


함석헌은 역사를 생명의 진화로 본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역사는 그저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산 것이기 때문에 그 운동은 자람이다. 생명은 진화한다.(18) 역사는 자라나는 생명이다.


5) 하느님은 우주의 말[마루], 말씀이다. ⇒ 속알, 씨알, 생각, 말씀


한얼의 얼김이 우주 전체와 우주 안의 모든 만물 속에 두루 퍼져 있다. 우주생명의 비롯이고 씨알이고 원칙인 측면에서 고찰된 하느님이 곧 ‘한얼님’이며 ‘한울님’이다. 텅빔으로서의 우주가 하느님의 마음이기에 그리고 이 마음이 무한우주 속에서의 유한우주의 다양한 펼침을 다 담고 있기에, 우주의 변화와 진화 속에 그 마음은 한얼의 얼김으로 작용한다. 우주 속에 보이지 않게 담겨 있는[없이 있는]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마루뜻[종지(宗旨)]이라고 한다.(19) 그리고 이러한 우주진화의 마음은 낱낱의 우주만물 속에 각인되어 세세대대 전해지는데, 그것이 곧 속알이며 씨알이며 바탈이다. 


몸[물질]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마음으로도 존재하는 생명체에 이르러 우주 속 하느님의 마음과 생명체의 마음 사이에서 교통이 펼쳐진다. 마음뿐이 아닌 정신으로 존재하는 사람에 이르러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이것이 곧 생각이다. 우주생명[한얼]의 긋[끄트머리]이 이어이어 이어져 우리 안의 속알과 씨알로 전해져 우리의 얼존재[얼나]를 이루고 있는데, 이 얼나가 자신의 비롯이고 말미인 한얼을 생각하게 만든다. 한얼이 일으킨 생각의 불꽃으로 인해 사람은 하느님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 그리움을 그림으로 그렸고 이 그림이 줄여져 글이 되었다.(20)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은 말없이 자신의 몸집을 태워 하늘의 뜻을 이행한다. 이것이 우주생명의 원칙이며 생명의 의미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사뢰는 존재인 ‘사람’은 자신 안에 담겨 있고 우주 전체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야 한다.(21) 이렇게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게 되면서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말을 하고 글을 쓰게 된다. 그림이건 말이건 글이건 모두 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생각이 문제요 말씀이 문제다. 생(生)도 사(死)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생각이다. 사람에게는 진리의 생각이 문제다. 위로 올라가는 생각이 문제다. 위로 올라가는 생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참이다. 나를 통한 성령의 운동이 말씀이다. 성령은 내 마음 속에서 바람처럼 불어온다. 내 생각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은 것이 말씀이다.”(22)


다석은 “오직 하느님의 뜻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입을 꽉 다물고도 응답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강조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23)


다석에 의하면 우리말 ‘말’은 ‘마루’에서 나왔다. 하느님의 마루(뜻)라는 의미가 우리말  ‘말’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말은 하느님의 마루다. 하느님의 마루가 우리의 얼 속으로 들고날 때 우리 안에서는 생각의 불꽃이 튀게 된다. ‘말슴’은 그렇게 튀는 생각에 답하면서 하느님의 마루를 우리의 말로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의 마루를 세우기 위해 인간의 말을 쓰는 것이 ‘말씀’이다. 이렇듯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 뜻에 따라 말을 세우고 말을 쓰며 사는 삶을 다른 말로 말숨을 쉬며 사는 ‘말숨살이’라 한다. 다른 말로 그것은 말을 쓰며 사는 ‘말씀살이’이다. 말숨을 쉰다는 것은 영원을 그리워하며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타고 있는 참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다.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에 말숨을 쉬면서 우리는 몸이 아닌 얼로 숨을 쉬는 것이다. ‘얼’로 숨쉬는 한에서 말숨은 다른 말로 ‘얼숨’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한얼[우주생명]과 하나가 되어 쉬는 숨이다. 그러기에 얼숨은 또한 ‘우숨’(우주적인 숨)이다. 가장 큰 우숨은 절대생명과 하나 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초월해서 짓는 웃음[우숨]이다.(24) 얼숨은 바로 존재의 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사는 양상이며, 그 임무는 우주 안의 보이지 않는 한얼을 우주만물 속에 펴차는[우주만물에 펼쳐 채우는] 데에 있다. 다석은 유비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펴참이다’라는 말을 한다. 다석에 따르면, 우리는 가슴에 생명의 숨길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배(속)에는 얼뜻을 가지고 있다. 태양과 씨알이 하나가 되듯 우리의 얼나가 한얼을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씨알이 태양을 만나 바탈이 터서 자라 나무가 될 때 태양과 하나가 되듯, 우리의 속알(바탈)이 한얼을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도 나무가 될 수 있다. 다석은 이처럼 생명의 잎과 바탈의 꽃과 얼뜻의 열매라는 차원을 고루 헤아려서 인간의 참 생명의 길을 유추해낸다. 우리는 생명의 숨결을 받아 잎사귀를 키우고 우리의 바탈을 꽃피워 얼뜻의 열매를 맺는다.(25) 


6) 하느님은 우주의 지향점[목적]이다. ⇒ 하나님, 한웋님


다석은 우주의 비롯이며 마침을 ‘하나[님]’에서 본다. 온통 전체로서의 텅빔이고 모든 상대적 유와 상대적 무를 다 담고 있는 빈탕한데로서의 절대공(絶對空) 또는 절대무(絶對無)를 ‘하나’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를 추구하는 것이 모든 인생과 종교와 만물의 본분이고 사명이다. 인생과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귀일(歸一)]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시작해서 종당에는 하나로 돌아간다. 대종교가나 대사상가가 믿는다는 것이나 말한다는 것은 다 ‘하나’를 구하고 믿고 말한다는 것이다. 신선이고 부처도 도(道)를 얻어 안다는 것은 다 이 ‘하나’다.”(26) 


하늘, 하느님, 하나를 동일시하면서 다석은 “하나를 알고 하나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하나’는 앎의 대상만이 아니라 삶의 대상이고, 참여와 일치의 대상이다. 하나를 알고 하나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사는 것”이다.(27) ‘하나’는 존재와 생명의 근원과 목적이며 생명 진화와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생명 진화와 역사의 중심에 있는 인간에게는 하나[하느님, 하늘]을 찾고 하나로 돌아가려는 본성이 있다. 하늘로 머리를 들고 곧게 선 인간의 모습이 하늘을 그리워하는 본성을 나타낸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궁신(窮神)은 식물의 향일성(向日性)과 같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다.(28)


“하느님은 무한한 공간의 큰 늘(常)이요 한 늘(常)인 영원한 무한우주다. 우리 머리 위에 받들어야 할 님이시라 한우님이시다.”(29) 우리가 받들어야 하고 추구해야 할 지향점으로서의 하느님을 다석은 ‘한우님’ 또는 ‘한웋님’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른다. 이러한 하늘의 하나(님)인 한웋님을 찾는 인간의 본성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으로 표현된다. 사랑의 대상은 “마음 그릇이 커감에 따라 자꾸 높은 님으로 바뀐다. 그 기량이 아주 크면 사랑의 대상을 영원 절대인 하느님에 둔다.”(30) 사람이 하느님을 찾아 올라가는 만큼 사람의 얼은 커 간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하느님]를 그리워하며 하나를 향해 나가는 존재이므로, ‘하나[하느님]’와의 관련 속에서 인정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따라서 다석은 ‘하나[님]’를 향해 올라가는 과정이 있을 뿐, 완전한 진리도 완전한 인생도 없다고 한다. 인생은 “옛적부터 자꾸 하나를 향해 시험의 길을 걷고 있다.”(31)


다석에게 ‘하나’이신 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통하는 나의 바탈,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각하고 추리하여 영원에 들어가는 길은 자기의 속알(본성)을 깨치고 자기의 뿌리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32) 하느님께 가는 길은 자기의 속으로 들어가서 치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33)


다석은 이 유일무이한 ‘하나’를 원일물(元一物, 원래 하나로 있는 것)이라고 한다. 본디의 하나인 원일물이 절대 진리 자체[절대진리물]이다. 다석은 ‘원일물’을 ‘본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상대 세계의 유무에 속하지 않은 원일물, 절대 ‘하나’가 ‘내’ 속의 속에 있다. 따라서 절대 진리인 ‘하나’를 이루려면 스스로 힘쓰고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34)


다석은 “없[무(無)]에 가자는 것, 이것이 내 철학의 결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없’이 내 속에 있다고 말한다. ‘없’은 상대 세계와 단절된 것이 아니다. ‘없’은 상대적 존재[유(有)]의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상대적 존재와 함께 전체 하나를 이룬다. 하느님은 ‘있음[유(有)]’을 나타내는 물질과 ‘없음[무(無)]’를 나타내는 맘을 통전시키는 ‘하나’이다. “몬, 맘은 둘이 아니고 하느님[큰 하나]만이 계시니라.”(35)


없이 계신 하느님은 유와 무를 종합한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유무를 합쳐 신을 만들고, 천지유무를 통하는 것이 신통이다. 신은 하나이다.” 전체로서의 하느님의 자리는 온갖 시비를 넘어서서 ‘하나 됨’에 이르는 자리이다. “시시비비 따지는 것은 내가 지은 망령이요 (…) 하느님을 믿고 만족하면 일체의 문제가 그치고 만다. 시비의 끄트머리는 철인의 경지에 가야 끝이 나고 알고 모르는 것은 유일신에 가야 넘어서게 된다.”(36) 없이 계신 하느님과 통하면 신통하여 천지유무를 통하고 옳고 그름, 앎과 모름을 넘어서 하나로 통하게 된다. 


“모든 문제는 마침내 하나(一)에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언제나 하나[전체]인데 하나(一)로 참 살고 하나(一)로 돌아가자는 것이다.”(37)


▶ 다음 편에서는 ‘영성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1)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20.


(2) 참조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152. 류영모, 『다석강의』, 465.


(3) 참조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239/40.


(4) 참조 같은 책, 246/7.


(5) 이러한 신적 존재를 우리는 일체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무한히 커다란 울이라는 뜻으로 ‘한울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6)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45.


(7) 참조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308.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서 지나간 무지를 바로 알아 잊어버린 전체를 찾아야 한다. 하나(절대)를 찾아야 한다. 하나는 온전하다. 모든 것이 이 하나(절대)를 얻자는 것이다. 하나는 내 속에 있다. 그러니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같은 책, 309.)


(8) 참조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248.


(9)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하권』, 문화일보, 1996, 321.


(10) 같은 책, 71.


(11) 같은 책, 93.


(12) 참조 류영모, 『다석어록』, 215.


(13) 참조 같은 책, 233.


(14) 류영모, 『다석어록』, 30. 참조 류영모, 『다석강의』, 217, 294, 370, 861.


(15) 함석헌, 『함석헌 전집 9. 역사와 민족』, 한길사, 1993, 42. 장회익, <온 생명과 함석헌 생명사상>, 『씨알의 소리』 통권제175호(2003.11/12), 68~91.


(16) 함석헌, 같은 책 같은 곳.


(17) 참조 김상봉,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세계역사’>, 『씨알의 소리』 통권제183호(2005.3/4월호), 27.


(18) 함석헌, 같은 책, 57.


(19) 다석은 우리말의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한다. “말은 하늘 마루 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우리는 그 말을 받아서 씀으로 하느님을 안다. 그렇게 말을 받아서 쓴다고 말씀이다.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써야 한다.”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박영호 풀이, 130/1.


(20) 참조 같은 책, 117.


(21) “하느님이 [291] 우리 인간에게 높은 생각을 하게 하고 그말을 하게 시키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 ‘사ㄹ·ㅁ(사룀)’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사뢰는 중심이 우리 ‘사ㄹ·ㅁ’이란 말입니다.” 유영모, 『다석강의』, 290/1.


(22)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110.


(23) 같은 책, 122.


(24) “언제 숨이 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숨지기 전에 숨을 길러놓아 영 지지 않는 목숨을 길러내는 것이 오늘의 할 일이다. 그 길은 목숨을 말숨으로 바꿔놓는 일이다. 목숨을 말숨으로 바꾸고 말숨을 웃숨으로 바꾼다. 웃숨(天命)을 웃는 말숨만이 영원한 목숨에 들 수가 있다.” 류영모,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김흥호 편, 76. 


(25) 참조 김흥호, 『다석일지 공부. 류영모 명상록 풀이 1』, 510 이하.


(26) 유영모, <까막눈>, 『다석일지』(영인본) 상, 1982, 833.


(27) 유영모, <여오>, 『다석일지』(영인본) 상, 1982, 832.


(28) 유영모, <매임과 모음이 아니!>, 『다석일지』(영인본) 상, 1982, 743.


(29)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239. 다석은 ‘한우님’이라는 표현보다 ‘한웋님’이라는 표현을 좋아했음이 그의 강의에서 확인되고 있다. “님. 언제든지 머리에 일 수 있는 ‘님’, ‘한웋님’, ‘한울에 있는 님’입니다.”(유영모, 『다석강의』, 896] “한웋님 할 때의 ‘우’는 위아래를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고, 상대(相對)에서 ‘위’를 높이 들어올린다는 뜻이어서 ‘ㅎ’ 받침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유영모, 『다석강의』, 897) “‘한웋님’의 ‘웋’에서 이응(o)은 목구멍을 그대로 둥글게 하면 소리가 나옵니다. 더 깊은 소리를 내려면 ‘ㅎ’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를 더 깊이 받드는 뜻에서 ‘웋’이라는 소리가 안 나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에서도 첫소리를 ‘ㅎ’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웋님’입니다.”(유영모, 『다석강의』, 912) 


(30) 박영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상, 두레, 2001, 33.


(31) 유영모, <하나 되게>, 『다석일지』(영인본) 상, 1982, 812.


(32) 유영모, <하나>, 『다석일지』(영인본) 상, 1982, 757, 760. 


(33) 참조 박재순, 『다석 유영모』, 현암사, 2008, 340/1.


(34) 유영모, <까막눈>, 『다석일지』(영인본) 상, 1982, 833-6.


(35)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328, 330, 337.


(36) 유영모, <여오>, 『다석일지』(영인본) 상, 1982, 832.


(37) 박영호 엮음, 『다석 유영모 어록』, 두레, 2002, 40.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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