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의 문헌은 가톨릭교회 이야기 말고도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는 세계유산”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일, 전임 교황 비오 12세 임기(에우제니오 파첼리, 1939-1958)의 문서고를 학자들에게 전면 개방했다. 이에 따라 히틀러 나치 체제에 침묵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비오 12세의 행적에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3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비밀문서고 관계자(현재는 사도 문서고로 개명, 최고 장서관 조제 톨렌티누 데 멘돈사 추기경)들과의 만남에서 비오 12세 선출 80주년을 기념하며 비오 12세 문서고 개방을 결정했다. 교황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과거에 비오 12세의 문서고 일부를 개방한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중하고 객관적인 역사 연구가 적절한 조명과 비판을 통해 비오 12세의 칭송할만한 순간들과 더불어, 심각한 어려움, 왜곡된 결정, 인간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중함을 보여준 순간을 드러내줄 것”이라고 밝혔다. 교황은 “어떤 이들에게는 함구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심각한 어둠과 잔혹의 시기에도 인도적 지원, 은밀하지만 적극적인 외교의 불씨를 살리기 위한 인간적이고 치열한 시도였다”고 말했다.
교회는 역사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사랑하며,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역사를 더 많이, 더 잘 사랑하고자 한다.
교황은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며 “전임자들과 같은 신뢰를 담아 나는 연구자들에게 이 문헌을 공개하고 맡긴다”고 밝혔다.
비오 12세 통해 교회사와 세계사 모두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기회
비오 12세 문서고는 외교 문서를 포함해 비오 12세 임기 중 생산된 모든 문서를 포함하고 있는 만큼, 당시 교황청이 나치 독일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로마 파리 신학원 파브리스 제스네(Fabrice Jesné) 교수는 프랑스 일간지 < La Croix >와의 인터뷰에서 “바티칸의 문헌은 가톨릭교회 이야기 말고도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는 세계유산”이라며 세계사적 기록이 교황청에 객관적으로 축적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로마 파리 신학원 역시 비오 12세 문서고 개방 소식을 알리고 “문서고 개방은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에게 훌륭한 기회”라며 “교황청 문서고는 엄밀한 종교적 쟁점을 넘어서 거의 전 세계 국가와 연관되어 있는 만큼 새로운 방식으로 당시 교회사와 세계사에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문서고의 분량은 1,600만 장의 서류가 담긴 15,000개의 서류철이다. 그 중 130만장의 외교문서를 포함하고 있는 비오 12세 당시 국무원 외무부 문서고는 모두 디지털화 작업을 거쳤다. 프랑스 일간지 < La Croix >는 일부 문서들을 사진으로 공개했다.
문서고에는 나치 주간지 < Das schwarze Korps >의 1937년 판본도 있었다. 이 주간지 1면에는 비오 11세 때 교황청 국무원장을 지내고 있던 에우제니오 파첼리(비오 12세)를 조롱하는 삽화가 실려 있다. 파첼리 추기경을, ‘독일 그리스도교 신자 박해’라는 기사가 실린 프랑스 좌파 진영의 신문을 읽으며 유대인 여성에게 포옹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치를 반대한 비오 11세의 교황회칙 『심히 우려하여』(Mit Brennender Sorge)의 초안을 작성한 미하엘 폰 파울하버(Michael Von Faulhaber) 추기경을 비난한 나치의 선전물도 공개되었다.
비오 12세가 되는 파첼리 추기경도 국무원장으로서 회칙 작성에 참여했다. 파첼리 추기경은 나치 독일과 히틀러의 만행을 두고 “인종, 민족, 국가, 권력기관 또는 기타 인류의 특정한 가치를 일반적 기준보다 높이 생각하고 우상화할 정도로 신격화하여 하느님이 계획하고 창조하신 세상의 질서를 뒤틀고 전복시키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참신앙과 동떨어진 사람”(『Mit Brennender Sorge』, 7-8항 참조)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외에도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교 랍비 등이 비오 12세에게 보낸 도움 요청 서한과 감사 서한, 나치 독일군이 총살한 335명의 이탈리아 시민의 명단 등이 문서고에서 보관되어 있었다.
비오 12세의 ‘침묵’은 유대인을 살리기 위한 작전이었나?
비오 12세 문서고를 열람한 마테오 루이지 나폴리타노(Matteo Luigi Napolitano) 몰리세대 교수는 비오 12세 하에서 교황청이 유대인 학살에 보인 태도를 두고 “유대인을 향한 관심은 당시 교황청 행보의 보편적인 태도였다”며 1938년부터 1946년 시기를 다룬 ‘인종 및 종교 난민들에 대한 지원과 보조’와 같은 “(서류철의) 제목만 보더라도 감이 잡힌다”고 말했다.
나폴리타노 교수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이 교황청에게 유대인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언급한 서한들이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며 “이는 비오 11세와 비오 12세를 통틀어 박해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공고한 연결망이 존재했음을 증명해주는 문서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비오 12세가 침묵으로 유대인 학살을 방관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렇다면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 행한 일들에 대해 비오 12세에게 보내진 보고서를 포함한 기존 문서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라며 “비오 12세 때처럼 위계질서가 강한 교회에서 이 모든 일이 교황이 모른 채로 이뤄질 수 있었을까? 이는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나폴리타노 교수는 “이러한 문서들을 연구하는 일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 모든 것이 점점 더 명확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나폴리타노 교수는 위와 같이 탄압 받는 유대인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이 분명 존재하는 만큼 비오 12세가 대외적으로 아우슈비츠를 언급했냐 하지 않았느냐의 문제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우리는 연구하는 인물과 동시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비오 12세의 경우) 우리는 유대인 박해에 관한 비오 12세의 침묵이라고 불리는 것이 ‘작전적인’ 침묵인지 아닌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