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을 막기 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담한 외교적 조치들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러시아의 정신적 지주인 러시아 정교회 수장과 대화에 나섰다.
지난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러시아 정교회 수장 키릴 총대주교와 영상통화를 갖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멈추는데 협조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번 영상통화에는 교황과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쿠르트 코흐(Kurt Koch) 추기경이,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키릴 총대주교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대외관계부 의장 힐라리온(Hilarion) 대주교가 배석했다.
교황청 공보실은 이번 영상통화가 “사목자로서 평화를 위한 길을 가리키고, 평화의 은총과 더불어 전쟁을 멈추기 위한 의지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러시아 정교회를 향해 “교회는 정치의 언어가 아닌 예수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며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하나의 성스러운 민족을 이끄는 목자이다. 우리는 그렇기에 평화를 돕고, 고통받는 이들을 도우며,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되어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과 키릴 총대주교는 모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진행 중인 협상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교황은 “전쟁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사람들, 즉 러시아 군인들과 폭격을 당해 죽는 사람들”이라며 “목자로서 우리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며 이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성전이나 정의로운 전쟁을 이야기하던 때가 있다. 지금은 더이상 그렇게 말할 수 없다. 평화의 중요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양심이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교황은 키릴 총대주교와 함께 “교회는 평화와 정의를 북돋우는데 기여해야 한다”는데 동의하면서 “언제나 모든 전쟁은 불의한 것이다.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아이들, 사망한 여성들, 모든 전쟁의 피해자들 앞에서 우리는 흐느낄 수밖에 없다. 전쟁은 절대로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목자로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모든 민족을 도울 것을 명하고 계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정교회 측 성명문은 상세한 내용을 공개한 교황청과 달리 간결했다. 러시아 정교회 측에 따르면 이날 영상통화에서는 “우크라이나 영토 내 상황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현 위기에 관한 인도적 측면이 거론되었으며 양자는 모두 “현재 진행 중인 협상과정의 최우선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황청과 러시아 정교회의 성명문을 비교해보면, 이번 대화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키릴 총대주교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은 것으로 풀이 된다.
교황청 성명에서는 “키릴 총대주교와 뜻을 같이 했다”라는 표현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소개했다. 반면 러시아 정교회 측은 “현 위기”라는 표현만을 사용하며 러시아의 침공이나 전쟁에 관한 모든 발언을 자제했다.
키릴 총대주교는 같은 날 성공회 수장 저스틴 웰비 캔터배리 대주교와도 영상통화를 가졌다. 이를 고려하면 러시아 정교회 측 역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되 고립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웰비 대주교와의 만남에 관해 “키릴 총대주교는 2014년 이후의 양상에 관한 러시아 정교회의 입장을 상세히 설명했다”고 밝히며 “총대주교는 특히 모든 사람이 정치적 박해를 받는 상황에 처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신앙을 자유로이 고백하고 자기 모국어를 말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정부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정교회와 러시아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박해하고 있다는 주장을 이어감으로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고 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중단하기 위해 오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25일)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에 봉헌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봉헌 행위는 전 세계 분쟁이 심화될 때 이루어졌던 교황들의 ‘영적 무기’로 해석된다.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1942년에는 비오 12세가, 냉전 시대였던 1981년과 1984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전 세계를 성모에게 봉헌한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키릴 총대주교와의 통화에 앞서 16일 오전 일반알현 후 발언에서 나폴리 대교구장 도메니코 바탈리아(Domenico Bttaglia) 대주교가 작성한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를 낭독하기도 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키이우의 폭격 가운데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카르키우 벙커에서 어머니 품 안에서 죽어간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20살에 전선으로 보내진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십자가 아래서도 여전히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과 키릴 총대주교는 지난 2016년 쿠바에서 1000년 만에 만남을 갖고 본격적인 교류를 위한 물꼬를 튼 바 있다.
프랑스 일간지 < La Croix >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양 교회 간 관계가 경색되면서 오는 6월 예정되어 있던 두 교회 수장 간 만남에 관한 물밑 작업도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