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토요일(2022.5.21.) : 사도 16,1-10; 요한 15,18-21
초대교회 시절에 바오로 일행은 소아시아에서 복음 선포에 진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서해안의 트로아스로 내려가서 유럽으로 건너가라는 환시를 받고 그리스의 마케도니아로 넘어 갔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서향하게 된 역사적 전환이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서진하며 복음을 전하게 하신 성령께서는 제1천년기에는 유럽 대륙에 십자가를 세우게 하셨고, 제2천년기에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하셨는데, 이 제3천년기에는 아시아에 사랑의 문명을 세우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아시아의 복음화 과업은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불교나 힌두교와 유교 등 아시아의 고등 종교들은 독자적 구원체계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시아에서 태어나신 구세주께서 아시아 대륙의 백성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남아 계신 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중세 이후 유럽의 역사를 주도해 온 가톨릭교회가 루터로 인한 분열 사태를 겪으면서 아시아 선교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아시아의 고등 종교와 앞선 문화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로마화된 가톨릭교회의 서구적 신관과 교리 그리고 유럽식 교회 모델을 옮겨 심으려고 했을 뿐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 안에서도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함으로써 주도권을 상실하여 팽창적인 제국주의 정책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으려던 열강들의 식민정책에 들러리로 선교활동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시아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교는 영락없는 서양 종교였고, 함포와 군대를 앞세워 개종을 강요하여 종교적 식민지를 얻으려던 제국주의 세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아시아 종교의 신봉자들은 예수님을 부처님이나 공자님 같은 성현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으로 여기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서양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시아에 선교하러 온 서양 선교사들이 그분을 서양인의 이미지로 소개했기 때문이고, 그분의 가르침도 서양의 논리로 된 교리로써 전했기 때문이며, 그분의 교회 역시 유럽식 모델로 이식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까지도 이 세 가지 스타일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아시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불교의 사찰들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의 향교들도 우리 민족의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자리 잡고 있는 형편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이야말로 21세기와 제3천년기를 위한 성령의 이끄심이며 이에 따른 ‘새 복음화’가 아시아 대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호소하신 바 있습니다. 제1, 제2천년기의 시행착오를 딛고 할 수 있는 한 근본적인 방식으로 새 복음화가 이루어지자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룩하신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고고하게 내려다보지 않으시고 세상에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셨으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으로서 말씀하시고 유다인의 사고방식과 성경도 익히신 후에 이 모든 것 속에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담아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시아 대륙에서 그리스도 신앙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공의회가 전제한 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우선 유럽인들이 받아들인 복음진리의 양식이 예수님의 복음진리를 정통적이고 보편적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아시아에 뿌리내리게 하는 토착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주체가 되어서 신앙 교리도, 성경 해석도, 전례적 표현까지도 아시아인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아시아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들과 교세 경쟁을 하려 들지 말고,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칠 줄 아는 사랑의 실천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공의회에서는 아시아를 비롯한 모든 대륙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인류 가족에게 봉사하려는 동기에서 정의와 평화, 자유와 연대성 같은 보편적 가치들에 바탕을 둔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일에 기존의 종교인들과 선의의 시민들과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가르친 바 있습니다.
1999년에 대희년을 앞두고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하여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아 주교들이 아시아 시노드에 모여 한 목소리로 권고한 바에 따르면, 일찍이 2천년 전에 바오로 일행의 발길을 가로막고 복음이 서향하도록 이끄신 성령께서 이제 이 제3천년기에는 복음이 동향하도록 이끄십니다. 아시아 복음화는 복음화 열기가 가라앉은 유럽을 비롯한 전체 보편교회에도 복음화의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교황청이 고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시아의 복음화 노력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 요청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 교회가 보전해 온 가장 정통적인 전통 중에서 가톨릭 사회교리를 아시아에 적용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 때문이고, 이렇게 하여 아시아 대륙이 복음화되면 사랑의 문명이 세워질 수 있어서 전체 인류와 보편 교회도 그 활력을 고루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의 이 역사적 전환점에 있어서 20세기 후반에 인도 캘커타에서 사랑의 봉사를 행한 ‘마더 데레사’(1910~1997년)는 모범적인 선교활동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빈민들이 많아도 그 다음 생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여기는 종교적 미신 때문에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운 나머지, 그는 그들의 시신을 마치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듯이 거두어 정성껏 상장례를 치루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임종에도 인간적 품위가 필요하다고 여긴 데레사 수녀의 이 같은 노력을 고깝게 생각한 현지 여론은 알바니아 출신으로서 서양 그리스도교의 수도자인 그의 처지로 보아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려고 인도 사회의 치부를 세계에 드러내고 있다고 볼멘소리로 비판하였지만, 그는 “힌두교인들이 더 좋은 힌두교인이 되고, 그리스도교인들도 더 좋은 그리스도교인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응수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캘커타의 데레사 수녀’를 아시아 복음화의 모범으로 삼아 2016년에 시성하였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