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2022.11.13.) : 말라 3,19-20; 2테살 3,7-12; 루카 21,5-19
가난의 신비를 통찰한 담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연중 제33주일에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지내자고 제정하신 이래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담화를 발표하셨는데, 이 연속된 담화 속에는 가난의 신비와 가난을 통한 구원의 신비를 통찰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해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에 이 담화를 발표하시는데, 안토니오는 잃어버린 귀한 물건을 잘 찾아준다는 속설이 있는 성인이고 보면, 우리 가톨릭교회가 잃어버린 귀한 영성을 찾아달라는 교황의 지향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가난의 문제가 신학과 사목의 주제가 되기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헌장 8항과 사목헌장 1항에서 가난과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제기할 당시까지만 해도, 워낙 많은 이슈가 혼재되어 있어서 크게 부각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공의회에 참석했던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이 각자 고국에 돌아갔을 때 마주하게 된 놀라운 현상이 공의회의 메아리로 들려왔습니다. 사제가 태부족했던 그 대륙에서 가난한 신자들이 스스로 모여서 복음 묵상을 나누고 있었고, 이 모임이 순식간에 대륙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으니, 주교들은 그 모임을 ‘기초교회공동체’라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흔히 청빈의 영성으로 포장되어 온 가난의 문제가 실제적인 선교적 현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 교회에서는 마태오 복음의 진복팔단에 나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루카 복음의 행복선언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던 한가한 분위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1968년 메데인 회의와 1979년 푸에블라 회의에서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주교들이 가난한 이들을 대변한 신학자들의 현장 보고를 ‘해방신학’이라 이름 붙여 대우했으며, 가난과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는 ‘해방’이라는 성서적 주제로 전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교회 역사상 유럽 이외의 지역의 목소리가 바티칸을 움직였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교황청에서는 1984년과 1986년에 두 훈령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에는 「노동하는 인간」 회칙에서 노동의 영성으로, 1987년에는 「사회적 관심」 회칙에서는 국제 교역상 불평등한 현실을 환기시키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 행동을 촉구함으로써 가난의 문제를 교도권과 신학의 공식 주제로 언명하였습니다. 이로써 가난과 가난한 이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성서를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봇물 터진 듯이 밀려왔음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메시아, 예수
이러한 새로운 신학적 조류를 해석한 신학자들은 곧잘 코페르니쿠스를 소환하곤 합니다. 즉, 우리 눈에 태양이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저녁에 서쪽으로 지는 것으로 보이듯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천동설이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폴란드의 천문학자이면서 사제였던 코페르니쿠스는 관측과 계산을 병행한 결과 이와는 정반대의 학문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제기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덕 실천을 잣대로 하여 최후의 심판을 하시겠다고 일찌감치 구원의 기준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에 이미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령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임을 천명하셨고, 실제로도 몸으로나 마음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찾아다니시며 기적이 종종 일어날 정도로 진정성 있게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선포 행동이야말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신적인 징표였습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그렇지만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이래로 가톨릭교회의 발자취는 자연과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천동설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 겨우 지동설이 옳았다는 갈릴레이의 이론을 확인해 주면서 동시에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는 존재라는 신학적 명제의 진리성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의 관심과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의 신앙 감각 덕분에 우리가 사랑하기를 잊지 않을 수 있다는 기초적인 사실에서부터, 사실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들이 가난할 수 밖에 없다는 중간 정도의 인식을 거쳐,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는 그분의 자비를 입어야 하는 가난한 존재임을 깨닫는 최종 인식을 환기시켜 준 계기가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연속 담화였습니다.
청빈에서 가난으로
청빈의 영성은 가난한 이들의 처지에로 육화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중간 단계의 영성입니다. 이 사회적 육화를 포기하고 자신만의 청빈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의 영적 기만에 해당합니다. 모든 재화가 하느님의 소유인 이상, 그리스도인들의 청빈은 재화를 소유하되 더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개방되어 있어서 언제라도 나누거나 함께 사용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어야 올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대해 지니는 관심처럼 같은 비중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요청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교회 재정의 모델
마르코와 루카가 함께 기록해 놓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과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앞서 가난의 현실을 타개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일깨움을 주는 회초리입니다. 자본을 하느님처럼 대하는 자본주의자들에게도 투자를 해야 수익이 창출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처럼, 하물며 교회가 헌금을 하느님의 뜻대로 써야 그 교회를 믿고 신자들이 헌금을 하리라는 것 역시 상식에 속합니다.
그런데도 인색한 부자처럼 신자들에게 헌금을 걷어들이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든가, 쓸 일이 생기면 또 걷을 생각만 하는 교회라면 신자들도 지갑을 닫거나 또는 어차피 낼 금액에서 쪼개어 내리라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답게 돈을 쓰는 방식을 교회가 알려주려면 말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해서도 또 2차 헌금 명목으로만 생각하기보다는, 금액이 적어도 이왕에 신자들이 봉헌해 준 헌금을 가난한 이들에게 쓰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생생한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돈이 모자라서 가난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이 인색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인색한 부자들이 갑자기 회개해서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는 그런 날은 세상 끝날까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일러주는 현실적인 인식은, 가난하셨던 예수님을 본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자라서 가난한 이들이 생겨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가난한 이들이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도록 촉구하는 구원의 동반자로 여겨야 한다는 메시지가 성서적 지동설입니다.
결국, 가난한 이들은 오늘날 누구인가?
가난에 담긴 구원의 신비에 관한 통찰로 담화를 발표해 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은 “세상의 골칫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본질을 우리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도록 도와주는”(2017년, 1차 담화) 천사들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귀를 열어 놓으심을 믿고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주님의 자비로우신 손길로 해방되는”(2018년, 2차 담화) 본연의 신앙인들이라고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은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탐욕을 보이게 드러내어주는 이들이어서,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난과 궁핍이 구원의 힘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이 비논리적으로 보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힘은 십자가에 있다는 논리를 증명해 주는”(2019년, 3차 담화) 또 다른 예언자들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흔히 더럽고 게으르며 종종 부도덕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믿는 이들도 이 편견 성향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가난한 이들이 도덕적으로 성화되기를 기대하면서 도와주는 태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의 성화는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몫일 뿐 우리가 행하는 도움과 나눔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저, “가난한 이들에게 손을 뻗기”(집회 7,32)만을 바라십니다. 우리의 손이 닿은 가난한 이들의 마음은 하느님께서 움직이실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손을 뻗으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케 만드는 천사들인 것입니다(2020년, 4차 담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우리에게 환기시키셨습니다(마르 14,7). 하지만 당신을 기념하는 전례에서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가난한 이들이 항상 우리 곁에 있더라도 그들을 외면하기 마련임을 그분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기념하는 모든 전례에서는 그분과 함께 그분이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도 함께 기억하는 것이 실제로 우리 곁에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가난한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은 우리가 전례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일깨워주는 길잡이들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가 자선을 베푸는 대상이기 이전에, 우리를 불안과 피상성의 덫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2022, 6차 담화).
교우 여러분,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십시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