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역 북 광장은 송림동 성당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성탄절 녹사평역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미사를 봉헌하고, 희생자 유가족들의 가슴 아픈 얘기들을 듣다 눈시울을 적시며,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전철에서 내려 지하도를 걸어 나옵니다. 올해도 여전히 노숙자들이 추위를 피해 지하도 출입구 구석이나 교차로에서 떨고 있습니다. 이곳에 노숙자들이 여전히 모여드는 이유는 ‘민들레 국수집’이라 불리는 무료 밥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자기 입에 들어갈 밥을 걱정하며 부산한데, 여기 민들레국수집은 남의 입에 들어가는 밥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느슨하게 모여있습니다.
“거기에도 위계가 생겨 괴롭히는 사람들 있어요. 그냥 좀 추워도 밖이 좋아요. 자유롭고.”
사람들은 “노숙자들은 공무원들이 시설에 들어가라 해도 들어가지 않고 계속 나옵니다. (…) 얼어 죽든 말든 그것은 그들 마음이고 책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지 않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 더 그들에게 물었어야 했습니다. 왜 시설에 들어가시지 않느냐고. 저는 그저 들었습니다. 그 이유 한 가지는 “시설에서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 많고, 거기에도 위계가 생겨 괴롭히는 사람들 있어요. 그냥 좀 추워도 밖이 좋아요. 자유롭고.”
2023년 대한민국 대통령은 과거 후보 시절에 “극빈한 자들은 자유를 느낄 수도 없고,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의 말은 틀렸습니다. 완전히 틀렸습니다. 자유는 인류 역사 가운데 가난한 자들의 요구였습니다. 그것을 빼앗은 자들은 언제나 배부른 부자들이었습니다. 부자들은 법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사용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화물연대의 파업이나, 노동자들의 연대는 불법이 되었고, 불온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법질을 통해 수십억의 대가성 뇌물을 받았지만 처벌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애꿎은 야당 당대표가 온갖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수사로 수십 회의 압수수색을 받았을 뿐입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자유를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이들은 마약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대기업의 손주, 손녀들이, 스타덤에 오른 돈 많은 인기연예인이 마약에 빠져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높은 자리 검사, 판사들이 숲속 별장에서 향락과 성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동산과 재테크의 노예, 권력의 노예, 학력과 스펙의 노예, 종교의 노예, 그들은 모두 무언가에 묶여 노예가 되어 있었는데 거꾸로 ‘자유’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중독(addiction)’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addicere’로 양도하다, 굴복하다. 노예가 된다는 말이다.
라틴어의 ‘addicere’는 양도하다. 굴복하다. 노예가 된다는 말입니다. ‘중독(addiction)’이라는 말의 어원입니다. 현대인들은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참아내기 어려운 삶의 환경들로 알콜, 마약, 게임, 도박, 권력, 쇼핑, 성행위, 성형 등에 중독되어 버렸습니다. 노예가 되어 불편한 상황이나 상태를 전환시키는 물질이나 대상, 상호작용에 묶여 버렸습니다. 중독은 이내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고 충동적이고, 강박적이게 하며 그들을 옭아맵니다. 중독의 확실한 징후는 자신과 타인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며 부정하고 은폐하려고 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력을 속이고, 주가를 조작하고, 온갖 거짓말과 불의로 가득 찬 충동적인 모방과 표절이 난무합니다.
그들은 자유로운 듯하지만 지금 가시방석에 앉아 있습니다. 이미 그들을 향한 심판은 그들 양심의 한복판에서 심각한 분열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당에서 교리를 할 때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말해줍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는 ‘양심’이 끊임없이 내면을 불안하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니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사와 법사, 무속의 주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유로운 사람들은 하늘 아래 집 한 칸 갖지 않은 노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소유하지 않고 누구의 재산을 강탈하지도 않았으며 죄 없는 이들에게 죄를 덮어씌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에도 성당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환영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소란스러운 무리를 보았습니다. 죽은 자식을 가슴에 품고 위패와 영정을 모신 부모들 앞에서 신나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대며 조롱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분열되어 있었고, 비뚤어진 종교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내는 위대한 사랑의 시작이었습니다. 미사는 끝까지 봉헌되었고, 사제들은 하나가 되어 기도했습니다. 미사는 이미 세상의 소리와 소음을 뛰어넘어 하늘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사에 참여한 사제들과 이웃들이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시작되었습니다. 거룩한 성탄을 보았습니다. 슬픔 속에서, 절망 속에서,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위대한 사랑이 결국, 거짓을 부수고 진실을 보여줄 것이란 확신이 우리 가운데 가득했습니다. 고 최민석 라파엘의 어머니는 ‘지혜서 4장’을 읽어내려갔습니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주님께서는 그 영혼이 마음에 들어 그를 악의 한가운데에서 서둘러 데려가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그 일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곧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죽은 의인이 살아 있는 악인들을, 일찍 죽은 젊은이가 불의하게 오래 산 자들을 단죄한다. 그들은 현인의 죽음을 보면서도 주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바라셨는지, 그를 왜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셨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을 보면서 냉소하지만, 오히려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그들은 나중에 수치스러운 송장이 되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치욕을 받을 것이다.” (지혜서 4, 13-17)
이 칼럼은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에도 실렸습니다.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