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성생활의 해를 맞아 6월부터 전국 네 곳에서 개최된 순회 심포지엄에서 김근수 가톨릭프레스 편집인의 강연 원고를 네 차례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평신도가 보는 수도회의 현실
존경하는 수도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제를 다룰 자격이 없는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되어 죄송합니다. 오늘 제 발표에는 여러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수도 생활을 하루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가 수도회 문제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문제를 알지도 못하는데, 해결 방안을 말할 수 있을까요? 제 개인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다른 학문도 그럴지 모르지만, 신학에서는 신학하는 사람 개인의 죄와 영성이 신학 연구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죄도 많고 흠도 많고 지혜도 용기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제가 겸손하게 말할까요? 정직하게 말할까요? 정직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수도회의 문제를 찾는 것보다 수도자를 격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도회가 닥친 문제가 많다 하여도, 수도자로 사는 의미와 매력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도회에는 걱정이나 문제는 적고 감동할 것은 많습니다.
수도회마다 역사도 사정도 다르기에, 수도자 모두에게 중요하고 공통인 주제를 다루고 싶습니다. 그래서 “수도자 영성은 예수 영성”이라는 작은 주제를 걸었습니다. 왜 이 주제를 택했을까요?
오늘처럼 교회 안팎에서 변화가 심하고 위기가 많은 시대에서 교리만으로는 수도자들이 세상에 적절하게 대응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민주화 활동에 참여한 수도자들의 아픔과 한계를 치유할 것은 결국 영성입니다. 영성이 충실한 사람이 결국 끝까지 잘 버틸 것입니다.
남미에서는 이러한 영성에 대한 그리움이 진즉 있었습니다. ‘해방의 영성’(레오나르도 보프), ‘정의를 위한 행동 영성’(에야쿠리아), ‘정치 영성’(소브리노)등 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영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피정도 자주 하고 영성 강좌도 많은 우리나라에 지금 어떤 영성이 있나요? 아무나 영성을 즐겨 언급하지만, 한국교회에 영성이 있기는 있는지, 있다면 어떤 영성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예수의 영성 아닐까요? 영성의 시작도 끝도 예수 아닐까요? 우리가 바라는 영성은 예수의 영성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고 해서 영성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영성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을까요? 영성이 형편없는 사람도 영성이란 단어를 즐겨 씁니다.
여기서 고백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영성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게 영성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성이란 단어를 쓰는 것도, 듣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성이란 단어는 현실과 관계없는, 오직 하느님과 나 자신의 관계를 뜻하는,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성당이나 수도원 등 특별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실천과 관계없는 묵상 차원의 것으로 오해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성이란 단어가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오해되기도 하고, 신앙을 평가하는 제1 기준으로 과장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영성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죽음 이후 문제나 죽음 자체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전의 삶을 주로 다룹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다루는 종교가 아니라 삶을 다루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이미 죽음으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은 죽음 이전에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입니다. 순교가 갑작스런 죽음이라면 가난은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이요, 천천히 진행되는 순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인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신학이나 종교를 어디다 쓴단 말입니까.
예수의 상대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예수의 말씀과 행동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당되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오직 가난한 사람에게만 전해졌다고 독일 성서학자 예레미아스는 말할 정도입니다.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공헌은 가난, 가난한 사람을 그리스도교의 핵심 주제로 복권시킨데 있습니다. 가난 문제는 신학에서 여러 문제 중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성서에 영성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을 평가하는 제1 기준은 영성이 아니라 예수 따르기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처음 하신 말씀, 그리고 마지막에 하신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성이란 단어보다 예수 따르기란 단어를 더 좋아합니다. ‘누가 영성이 있네 없네’ 라는 표현보다 ‘누구는 예수를 제대로 따르네 엉터리로 따르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오늘 어쩔 수 없이 영성이란 단어를 쓰기로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와 수도회 현실
먼저 한국교회 현실을 보고 싶습니다. 왜 현실분석부터 할까요? 제5차 남미주교회의 아파레시다 최종문헌 투표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당시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보기-판단-행동이라는 3원칙에 기초한 문헌 작성 방식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수파 주교들은 먼저 교리를 해설하고 그 다음 현실 적용을 다루는 트리엔트 교리서 방식을 제안하였습니다.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생긴 교리서에 그 순서가 적용되었습니다. 최종 투표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제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래서 아파레시다 문헌은 그 순서로 작성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도 그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에서 강론 대부분은 보기-판단-행동의 순서가 아니라 트리엔트 교리서 방식을 여전히 따르고 있습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얼마 전 시복된 로메로 대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이번 주 나라에서 어떤 큰 사건이 있었는지 꼭 소개하였습니다.
5월 23일 로메로 대주교 시복식 생중계를 평화방송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편집인으로 있는 인터넷 신문 가톨릭프레스에서는 인터넷 TV로 생중계하였습니다. 로메로 대주교 시복식을 한국천주교회는 아주 조용히 지나쳐 버렸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를 강조하는 것이 한국주교들에게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한국천주교회에서 주교들과 사제들은 가장 보수화된 그룹입니다, 일부 주교와 사제들은 사회참여에 활발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가장 보수화된 그룹입니다. 사제들은 천주교회가 중산층화 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평신도를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게 교육시켜 놓았습니다. 근본주의 계열의 신심단체를 키우고, 개혁적인 신심 그룹을 없애버렸습니다.
적지 않은 사제들은 골프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들라 했더니 골프채를 쥐고 있습니다. 정신 못 차린 사제들입니다. 고난의 현장에 가는 사제는 드물고, 시국사건에 관심 있는 사제는 적습니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교황의 교회 쇄신 노력을 지켜보거나 훼방하는 주교와 사제들은 적지 않습니다.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부 사제들도 교회 쇄신 문제에 대해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성직자주심주의를 고치려 애쓰는 사제들은 아주 적습니다.
평신도는 한마디로 눈치 보는 그룹입니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무관심하고 개인 신심에 몰두한 근본주의 그룹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잘 어울리고, 사목회나 신심단체 임원 대부분은 이런 흐름에 속합니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관심은 있으나 사제, 수도자, 동료 평신도에게 실망하여 갈등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미사에 참여하지만 그럭저럭 신자생활을 이어가는 그룹입니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관심은 많으나, 사제, 수도자, 평신도에게 실망하여 교회 변두리에 있거나 냉담하는 그룹도 있습니다.
수도회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개혁적인 그룹이라고 생각됩니다. 교회개혁과 사회민주화를 지지하는 비율이 사제나 평신도 그룹에 비해 높습니다. 고난의 현장에 많이 나타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쇄신 노력을 가장 환영하고 관심가진 그룹입니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교구 사제들의 위상에 밀려 교회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구의 힘과 위력에 밀려 수도회 존재와 역할이 평신도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수도회 역할에 기대가 높지만, 수도자들의 자존심이 비교적 낮은 편입니다. 사제, 평신도와 비교할 때 수도회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개혁적인 그룹이지만, 수도회 내부를 보면, 보수파가 여전히 더 많습니다.
수도회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선택과 개혁의지에서 차이는 있습니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관심이 적고, 개인 신심에 만족하는 수도자 그룹이 있습니다. 중산층 평신도들과 어울리고 중산층 생활방식에 젖은 수도자들입니다.
마치 성직자처럼 안락하게 사는 수도자도 일부 있습니다. 아무 쓸모없어 길가에 버려지는 소금처럼, 교회를 내부에서 좀먹고 부패시키는 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적극적이지만, 우울하고 외롭게 사는 수도자 그룹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 분명 여러 갈등이 있습니다. 개인적 이유, 신학적 이유도 있고, 정치적 이유도 있고, 교회 내 권력을 두고 다투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밑바닥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해석을 둘러싼 갈등이 있습니다. 마침 올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지 50년 되는 해입니다. 수도자 여러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잘 알고, 공의회 문헌을 잘 아시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몇 백 년은 걸릴 것이라고 칼 라너는 말했습니다. 성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도 못하는 한국천주교 처지에, 공의회문헌이 평신도에게 읽혀지기를 바라는 제가 바보 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서 가톨릭교회가 넘어지느냐 일어서느냐 결판날 것이라고 해방신학자 소브리노는 말합니다. 보수파 사제와 수녀도 개혁파 사제와 수녀도 매일미사, 기도, 피정은 하고 살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에서 그들의 태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왜 그렇게 태도가 달라질까요? 신학에 대한 태도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양신학은 ‘하느님나라 망각의 역사’라고 말한 독일의 성서학자 마틴 켈러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하느님, 삼위일체,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둘러싼 논의는 많았지만, 예수의 메시지인 하느님나라는 외면되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서양신학은 ‘가난한 사람들 망각의 역사’라고 말입니다. 예수의 12제자는 언제나 연구되고 언급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잊혀 졌습니다. 가난에 대해 묵상은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잊어 버렸습니다.
또, 서양신학에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큰 주제가 있습니다. 믿는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묻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리적으로 믿느냐, 시대 정신과 여러 학문의 질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이 관심입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에는 ‘신앙과 정의’라는 큰 주제가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 해방신학이라고 구티에레스는 말합니다.
‘신앙과 이성’, ‘신앙과 정의’-둘 다 필요하고 의미 있는 주제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주제를 주로 다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정의라는 큰 주제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주제에 치우치고 신앙과 정의라는 주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아니, 신앙과 이성이라는 주제라도 제대로 다루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