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남수단 방문은 2019년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한 한 장의 사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을 찾아온 남수단 지도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에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이었다.
여든 살이 넘는 고령에 고관절 통증으로 걷는 것조차 힘든,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교황이 세간의 눈에는 권력 투쟁에 눈이 먼 아프리카 대륙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입을 맞추는 모습은 그 자체로 여러 의미에서 충격을 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만큼 남수단의 ‘구체적 평화’에 진심을 보여왔다. 이처럼 ‘무릎과 입술’로 내전 종식과 평화를 호소했던 교황이 이번에는 ‘발’로 남수단의 평화를 호소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번 순방에는 교황과 더불어 성공회를 대표하는 저스틴 웰비(Justin Welby) 캔터베리 대주교와 이안 그린실즈(Lain Greenshields)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장도 함께했다. 이를 통해 교황은 교회일치가 세계 각지의 구체적 평화를 위해 긍정적으로 쓰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저스틴 웰비 대주교와 당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장이었던 존 찰머스(John Chalmers) 목사와 함께 남수단 평화 협정의 조속한 이행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2011년 탄생한 ‘신생 국가’인 남수단에는 여전히 여러 무장 세력들이 공존한다. 정부와 무장 세력을 비롯한 야당 간의 평화로운 정부 수립 및 이양을 위해 2018년에는 평화 협정이 체결됐다. 그 결과로 2013년 살바 키르(Salva Kirr) 대통령이 축출한 리에크 마차르(Riek Machar) 최고부통령(First Vice-President)이 복권되고 각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4명의 부통령이 임명되면서 평화 협정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키르 대통령과 마샤르 최고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내전이 일기 시작하면서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2018년까지 약 40만 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키르 대통령과 여러 무장 세력을 대표하는 야당은 2020년 이양을 위한 내각 수립에 동의했으나 여전히 내전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대통령과 최고부통령이 군, 경찰, 치안 인사권을 각각 60%, 40%씩 행사하는 내용의 통합 군사통수권 구축에 합의를 이뤘다.
하지만 지난해 8월, 그해 말로 예정되어 있던 ‘정부 이양 시기’를 2년 연장하겠다는 합의가 이뤄지면서 평화 협정이 순탄치 않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게 복잡한 남수단의 사정을 보여주듯 교황의 순방을 불과 하루 앞둔 2월 2일 카조케지(Kajo-Keji)에서 무장 세력의 공격으로 21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무릎까지 꿇어가며 호소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에는 남수단 지도자들을 향해 분노와 다급함을 숨기지 않았다.
교황은 살바 키르 대통령을 비롯한 남수단 당국과 시민사회를 만난 자리에서 “여러분이 봉사해야 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만큼 여러분의 ‘자녀’와 역사가 여러분을 기억할 것”이라며 “여러분이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 세대는 여러분의 이름을 기리거나 지우게 될 것이다. 강이 수원을 벗어나 자기 흐름을 시작하듯이, 역사의 흐름도 평화의 적을 뒤로하고 평화를 위해 힘쓰는 이들을 빛나게 해줄 것이다. 성서의 가르침처럼, ‘평화로운 이에게는 후손이 이어지리라’(시 37, 37)”라고 경고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히 키르 대통령과 5명의 부통령을 향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로마에서 함께 기도를 드렸던 하느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마태 11, 29)을 지니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린다”면서 “평화를 갈망하는 민족을 버려두는 일은 이 정도에서 그만하라. (…) 몇 해 전 우간다에서 어느 날 저녁 만났던 일을 가슴 속에 품고 있다. 그때 당신에게는 평화를 향한 의지가 있었다. 그러니 그 의지를 진전시킵시다.”라고 촉구했다.
‘공화국’(res publica)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권력의 목적은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 권력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이 항상 도사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떤 나라가 스스로를 ‘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공화국이 되기 충분치 않다. 원자재에서부터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축복으로써 내려주신 풍부한 자원이 일부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리는 특권이 되고, 공평한 부의 분배 계획이 곧 경제 활성화 방안이 되어야 한다.
교황은 이같이 당부하며 “이제는 말에서 행동으로 옮길 때”라며 “평화와 화해의 절차에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다. 서로 뜻을 모아 평화 협정과 더불어 이행안을 진전시켜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독려했다.
교황은 “문명화된 국가는 시급히 자기 시민, 그중에서도 가장 유약하고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이곳에서 살아가는 수백만 명의 이주민이 생각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군사충돌과 강제 이주로 인해 자기 집을 떠나 삶의 벼랑으로 밀려나게 되었는가!”라고 개탄했다.
내전으로 인한 실향민들 향해, “새로운 남수단의 씨앗은 바로 여러분”
다음날인 4일 ‘프리덤홀’(Freedom Hall)에서 내전으로 인해 자기 집을 떠나야만 했던 2,500여 명의 국내 실향민들을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은 남수단 지도자들에게 건넨 말과는 달리 “새로운 남수단의 씨앗은 바로 여러분”이라고 격려했다.
난민캠프의 상황은 열악하다. 지난해 12월에 발표된 UN 보고서에 따르면 유엔남수단임무단(MINUSS)이 보호하고 있는 남수단 실향민 난민캠프에서는 성폭력, 온갖 범죄행위 및 무기 밀거래 등이 벌어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로 다른 인종이면서도 모두 고통받았으며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여러분, 악을 다른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러분, 이제부터 형제애와 용서라는 선택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일구려는 것이 여러분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여러분은 수년간의 폭력이라는 오염을 양분으로 삼아 이를 형제애라는 산소로 내놓게 될 나무가 될 것”이라며 “물론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곳에 ‘심어져 있지는’ 않지만, 바로 이런 시련과 불안정 속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우리가 모두 같은 인류에 뿌리내린 사람들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형제자매이며, 우리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며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지상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여기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으로 남수단 독립을 이끌었던 존 가랑(John Gareng) 초대 남수단 최고부통령의 영묘를 찾아 이곳에서 교회일치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존 가랑은 현재 키르 대통령과 마차르 최고부통령이 따르던 남수단 독립의 상징으로서, 남수단 국민에게는 모든 국민의 통합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의 평화란 분쟁의 중단일뿐만 아니라 형제애적 친교”라며 “이 친교는 흡수가 아닌 통합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지배가 아닌 용서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강요가 아닌 화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내 기자회견서 ‘베네딕토 16세’, ‘성소수자’, ‘러시아’에 대한 입장 밝혀
순방 마지막 날인 5일 오전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는 이 땅의 소금”이라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비록 유약하고 우리의 힘이 온갖 문제들의 거대함과 폭력의 맹렬함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이더라도, 우리는 역사를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방에서 돌아오는 기내에서도 ‘베네딕토 16세’, ‘성소수자’, ‘러시아’에 대한 선명한 입장을 드러냈다.
‘베네딕토 16세 서거 이후 교회가 더욱 분열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의 죽음은 자기 논에 물을 대려는 사람들에 의해 수단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토록 선한 사람을, 그토록 하느님을 따랐던 사람을, 거의 교회의 성스러운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이들에게 윤리라고는 전혀 없으며, 그들은 교회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교황은 “나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었고, 의견을 나눌 수 있었으며, 그는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지지해주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교황은 “내가 성소수자 혼인에 관해 말했을 당시 자칭 위대한 신학자라는 어떤 사람이 베네딕토 16세의 친구를 통해 그를 찾아가 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는 당황하지 않고 신학자인 4명의 추기경을 불러 ‘이것을 설명해달라’고 청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이는 불만이 제기되었을 때 처리하던 방식을 보여주는 일화로, 베네딕토 16세가 새 교황이 한 이러저러한 일들에 신경질을 냈다는 몇몇 소문은 ‘저잣거리 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나는 베네딕토 16세에게 몇 가지 결정에 대해 의견을 구했고, 이에 그가 동의하고는 했다”고 답했다.
최근 화제가 됐던 성소수자 관련 인터뷰에 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는 무시해서는 안 될 문제”라며 “성소수자를 비난하는 것은 죄악이요, 성소수자를 처벌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 가톨릭교회 교리에 ‘성소수자는 소외받아서는 안 된다’는 문장이 있다”라고 답했다.
여전히 잦아들고 있지 않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해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러시아 대통령을 모두 만날 의향이 있다. (…) 주교황청 러시아 대사관을 찾아간 것도 푸틴과 이야기하러 러시아에 가고 싶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교황은 시리아, 예멘, 미얀마 등 내전이 일고 있는 국가들을 언급하고 “전 세계가 전쟁에 빠져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폭탄을 던지면 점점 더 큰 폭탄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