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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가 떨림이라면, 믿음과 실천은 울림
  • 이기우
  • 등록 2023-03-24 16: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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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2023.3.25.) : 이사 7,10-14; 8,10ㄷ; 히브 10,4-10; 루카 1,26-38


오늘 교회가 전례에서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를 마리아의 태중을 통해서 이 세상에 보내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구세주 메시아를 기다려온 오랜 대림의 역사가 이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바로 칠일 전에 교회가 성 요셉을 기억하는 날을 대축일로 보낸 이유도 구세주를 잉태하신 어머니 마리아께서 그의 정혼자(定婚者) 신분임을 상기하려는 뜻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세주는 신성으로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인성으로는 유다 지파에 속하는 다윗 가문의 후손이 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래 예고된 이래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기다려왔던 하느님의 약속이 바야흐로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이루어짐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성령 잉태라는 방식으로 직접 인류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는 천지 창조에 버금가는 구원 경륜의 시작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으니, 그것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나 개인 인생에 있어서나 그 주도권은 하느님께서 지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탄생 예고 사건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표징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이제까지와 달리 처음으로 직접 인류 역사에 개입하셔야 했던 이유는 사람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당신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하셨지만 사람들은 죄를 저지르고 타락하여 세상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세상을 당신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되돌려 놓으시고자 인류 역사에 개입하셨는데, 이 사건을 수태고지(受胎告知) 또는 성모영보(聖母領報)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에는 구세주께서 신적인 방식으로 강생하신 신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할 하느님 백성을 모으시려는 부활의 신비가 맞물려 있습니다. 이 하느님 백성을 통해서라야 세상이 다시 한번 당신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아름다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크게 창조와 부활의 계시로 요약됩니다. 먼저, 창조란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조성하신 것이며 인간도 그분이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운명은 하느님을 닮아가야 하고 그래야 인류의 구원과 세상 역사가 하느님의 뜻대로 완성될 것인데, 이를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리라는 믿음이 담겨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 다음, 부활이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다시 하느님의 자리로 돌아가시어 나타나심으로써 창조된 피조물들이 드디어 하느님께서 완성하시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음을 뜻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지니는 신앙의 신비는 가장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셨던 예수님께서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신 결정적 계시라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강생을 고리로 하여 창조와 부활이 이어지는 신앙의 신비가 세상과 인간의 완성을 이룩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섭리가 실현되자면 인간의 믿음과 실천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섭리가 떨림이라면 믿음과 실천은 울림입니다. 성령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구세주를 잉태하게 하셨다는 하느님 개입 사건에 대한 믿음은 기본이고, 사탄의 또 다른 유혹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필수입니다.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저질러진 원죄처럼 오늘날에도 돈과 힘을 숭상하는 자본주의 사조가 세상을 망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하느님을 닮아야 할 인간이 돈과 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돈과 힘을 숭배하는 죄악의 풍조에 물들어간다 하더라도 교회는 성모 마리아처럼 성령으로 인한 새 역사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진리에 있어서, 또한 정의와 평화에 있어서 성령께서 시작하시는 새로운 역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응답으로 구체화됩니다. 


이러한 믿음 없이 그저 단순한 정의감으로만 역사에 투신하려는 어설픈 선의의 무신론자들을 깨우칠 수 있는 좋은 표양이 이 응답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새로운 역사를 이룩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믿음으로 명심해야 할 바는, 동정의 몸으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강생의 신비가 창조의 신비를 완성하는 부활의 신비로 이어질 수 있는 고리도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진리를 전해 주시고 이를 알아듣고 실현하기 위한 온갖 십자가의 고통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꾸심으로써 인간과 소통하십니다(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 39-41항 참조). 


새로운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분의 정배로서 새 역사 창조의 협력자가 된 새로운 하와인 교회는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본받아 인류 역사의 시행착오와 부침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이를 하느님의 역사로 완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선악과가 아니라 생명과를 먹음으로써 세상과 인류를 하느님의 생명력으로 충만케 하려는 본연의 역할을 해내야 하는 것입니다(창세 2,16-17 참조). 


이렇게 성령 잉태와 동정 출산이라는 성모영보의 작고 내밀한 천사의 전갈로 시작되었으나 예수님의 속죄 희생으로까지 증폭된 성령의 떨림이 이제 우리네 혼의 울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모영보 전갈은 우리네 삶에서도 말씀이 울려 퍼지도록 발생한 성령의 떨림이기 때문입니다. 이 울림이 한겨레의 민족혼을 일깨워서 민족사의 시초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이끄심을 알아보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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