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금요일(2023.12.15.) : 이사 48,17-19; 마태 11,16-19

오늘은 주님의 빛인 신앙 진리의 세 번째 공리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 번째 주제를 다룰 차례입니다. 어제는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시고 살리시는 성령 하느님의 엄청난 공력이, 성자 하느님의 강생과 부활에 집중되었던 섭리에 대해 묵상한 바를 전해 드렸습니다. 실로 강생과 부활의 신비는 천지 창조의 신비에 맞먹는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제자들과 신자들에게 보내주심으로써 이룩하신 바를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 말씀을 통하여 ‘사기지은(四奇之恩)’으로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역사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엇박자는 하느님께는 크나큰 실망을, 백성에게는 재앙을 안겨 주었습니다. 오늘 독서가 그 내용인데,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여러 예언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계명을 가르치고 가야할 길을 인도했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이 우둔했고 백성들도 분별없이 부화뇌동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라가 멸망하고 백성이 또 다시 종살이를 하게 되어 버린 비극적 운명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귀를 기울였다면 평화가 강물처럼,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으리라는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사 48,18-19). 이런 심경이 널리 퍼져서, 이렇듯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오셔야만 한다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메시아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신 예수님께 대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깃장을 놓기 일쑤였습니다. 요한이 임박한 파국에 대해 경고하며 회개하라고 외쳤어도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활약을 펼치셨어도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습니다. 정말 통탄할 일이 벌어졌던 것이지요.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께서 오셨는데도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엇박자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절망적인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사도로 양성하시고 그들을 새롭고 참된 하느님 백성의 향도(向導)로 삼으시게 된 것입니다.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시기도 했지만, 임박한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그분은 다시 한번 당신이 받으신 하느님의 뜻을 유언으로 남기셨습니다. 그것이 성체성사입니다. 그런데 이를 네 복음사가가 다 보도하고 있지만, 공관복음의 보도들과 요한복음의 보도 사이에 결이 다릅니다.

공관복음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과 포도주의 축성과 그분의 말씀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으나(마르 14,17-21; 마태 26,26-30; 루카 22,14-20), 요한복음은 이 모든 절차와 말씀을 모두 생략하고는 그에 앞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동(요한 13,1-20)과 바치신 기도(요한 13,31-35; 14-17장)를 더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행동이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어주신 세족례이며, 그 기도란 대사제의 기도입니다.

세족례에서 그분은 당신이 스승이시면서도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발을 씻어주시면서 제자들더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다짐을 받으셨고, 이 성사적 행동의 의미를 밝혀주시기라도 하듯이 대사제의 기도에서는 당신이 제자들을 사랑해 준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15,12)고 새로운 계명을 내려 주셨으며 그리하여 하느님 앞에 하나가 되라(요한 17,11)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교회의 역사는 마치 구약의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보인 엇박자를 방불케 하는 시행착오를 반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로마의 후광을 입은 제국 교회적 면모라든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사도적 수위권을 둘러싼 서방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에 일어난 동서교회의 분열, 또 서방 교회 안에서도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두고 일어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분열, 심지어 동방 정교회 지역 안에서 이슬람 세력이 점령한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명분으로 벌인 십자군 전쟁, 서방 가톨릭교회 영역에서 수 세기 동안 자행된 종교재판, 그러다 보니 교회의 권위가 추락될 만큼 추락된 끝에 그리스도교 문화권 내에서 벌어진 무신론적 성향의 두 움직임 즉 공산주의 운동과 시민혁명이 일어나도록 방치한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인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선교를 하면서 원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도록 방치한 점, 아시아 대륙에 선교를 하면서 동양의 고유한 문화에 대한 무지로 무수한 신자들이 치명하도록 박해를 자초한 점 등도 치명적인 엇박자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대희년은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성령 강림의 은총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각오로 교회 쇄신의 기운을 불어 넣고 있습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각오와 기운을 ‘공동합의성’과 ‘신앙감각 존중’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쁨으로 세상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봉사하면서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려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서로 발을 씻어주는 상호 섬김의 정신으로 교회 내부의 논의 구조를 공동합의적으로 쇄신시켜 나아가야 하며, 대외적으로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평신도들의 신앙감각을 존중하는 가운데 복음적인 가톨릭교회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죽음으로 당신 자신을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하신 예수님을 보란 듯이 부활시키신 성령 하느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예수님께서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성령을 강림시키시기 전에도, 성령께서만 보여주실 수 있었던 고유한 은총으로 제자들을 사도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훗날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이러한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은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시다”(1코린 15,42ㄴ-44.51ㄴ53-54.57).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증언에 대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학자들은 이렇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며(impassibilitas, 손상되지 않음),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claritas, 빛남).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살아나고(agilitas, 빠름),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subtilitas, 예민함)”<출전: 가톨릭사전>.

겁이 많고 공포심에 사로잡혀 숨어 지내던 제자들을 담대한 믿음과 불굴의 용기를 지닌 사도들로 변화시켜낸 비결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발휘하신 이 사기지은 덕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 다락방에 문을 꽁꽁 닫아 걸고 숨어 지내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문을 열어 드리지 않았는데도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그리고 의심하던 제자 토마스에게 못 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나서 물리적 공간을 뛰어 넘어 사무치는 예민한 동작과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난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히 이 때는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두 제자와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에 관한 대화를 나누시고 빵까지 떼어 주신 직후여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공간 이동의 빠름까지 보여주신 터였습니다. 더군다나 막달레나에게는 동산지기의 차림으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는 낯선 나그네 모습으로, 예루살렘 다락방에는 예전의 익숙한 스승의 얼굴로 나타나셨으며, 열두 제자 가운데 일곱 제자만 따로 갈릴래아 호숫가로 모이게 하셨을 때에는 역시 낯선 어부 차림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그 제자들이 사도로서 활약하게 될 때에 체험하게 될 놀라운 선교적 성과를 암시하듯이 백쉰세 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풍어기적까지 체험시켜 주셨는가 하면, 베드로에게는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죄를 사면해 주시는 특별 고해성사까지 베풀어주셨습니다.

이렇듯 네 가지 특별한 부활의 은총, 즉 사기지은으로 부활의 현실을 톡톡히 체험시켜 주신 성령께서 이번에는 사도들의 놀라운 변화와 역시 이를 체험하게 된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생활로 박해 속의 그리스도인들을 이끄셨습니다. 사도들은 생전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확신하게 되어 유다인들을 한꺼번에 삼천 명이나 세례를 시키는가 하면, 아픈 이들을 고쳐 주시고 하고 마귀를 쫓아내기도 했으며 특히 죽은 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기적을 목격한 초대교회 신자들 역시 믿음을 회복하고 생전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서로 함께 지내며 빵을 나누고 가진 것을 공동의 소유로 내어놓고 궁핍한 이들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는 공동체를 실현해 내었습니다. 이렇듯 놀라운 변화가 사도들과 신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자 이를 보던 로마인들과 그리스인 등 이방인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찬탄과 존경심이 우러나왔고 이것이 폭발적인 선교 현상을 불러 있으켜서, 종내는 로마제국이 신앙을 공인하고 국교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이사야 시절과 공생활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엇박자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 바로 성령의 사기지은 덕분에 놀라운 선교적 성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지혜, 즉 성령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납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해졌던 19세기 백년 동안 우리 신앙 선조들이 체험했던 사기지은의 현실도 엄청났었음은 이미 여러 차례 전해 드린 바 있습니다. 빛남(이벽이 천주교 교리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교회를 세움), 빠름(이벽이 문중박해로 순교하자 그 동료들이 평신도 선교조직을 순식간에 결성하여 놀라운 선교 성과를 이룩함), 사무침(신유박해로 지도부가 와해된 상황에서 일반 평신도들이 전국으로 흩어져서 백 군데가 넘는 교우촌을 건설함), 상치 못함(입술배교자들과 치명자 후손들의 순교자 현양 및 순교정신 계승) 등이 그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이끄시는 부활의 사기지은이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요한 복음사가가 심혈을 기울여 기록하여 전해준 대로, 세족례와 대사제 기도로 남겨주신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성찬의 성사에 정성껏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사기지은이 우리를 통해서도 놀라운 선교적 성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완성하시는 성령 하느님의 역할이 이것입니다. 그리하여 태초에 우주 만물과 생명을 창조하셨던 하느님의 힘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의 인간 관계를 통해서 온 누리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하실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이 새로운 창조 과업을 앞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이러한 가르침으로 격려합니다. “그 때에 죽음은 패배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이며 약하고 썩을 것으로 심겨졌던 것이 썩지 않는 힘을 입을 것이다”(사목헌장 39항).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