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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신앙은 부활 신앙
  • 이기우
  • 등록 2024-04-06 11:5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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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2024.4.7.) : 사도 4,32-35; 1요한 5,1-6; 요한 20,19-31


하느님의 자비인 부활과 그 창조적 국면


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를 마감하는 부활 제2주일이며, 이 부활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한 이름으로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우리도 부활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일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자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이 되면 복음 말씀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해 불신앙의 표본으로 오해받아온 사도 토마스의 사연이 소개되곤 합니다. 그런데 제자 토마스가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혼자만 빠졌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이 스승의 부활을 전하자, 그분의 못자국과 창자국 상처를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전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노라고 버티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예수님께서 토마스가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 또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더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스승 앞에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뜨겁게 부활 신앙을 고백하고야 말았습니다. 열심한 신자들은 미사 중 사제가 축성된 성체와 성혈을 들어올리며 보여줄 때, 바로 토마스의 이 고백을 기도하기도 합니다.


토마스가 동료들의 전언을 듣고도 스승이 부활 소식을 믿지 않고 불신했던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들이 부활을 믿기에 이른 경위가 결코 광신적(狂信的)이지 않았고 그 반대로 매우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토마스가 보여준 태도에서 확인되듯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발현 체험을 바탕으로 부활을 믿는 합리적 태도야말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부활 신앙에로 이끌어주는 안전한 길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철썩같이 믿게 된 토마스와 그 동료 사도들은 일생을 바쳐 복음을 전했으며,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신앙 진리를 목숨까지도 바쳐서 증거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증거 덕분에 비로소 교회가 신앙 진리의 반석 위에 세워질 수 있었으며,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인류 역사가 하느님 나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섭리가 비로소 제 궤도를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인 부활의 창조적 국면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시작된 역사 창조의 현실


따라서 불신앙의 표본으로 보일 수도 있었던 사도들 덕분에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까지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이 거룩한 변화야말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만 씻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까지도 씻어주는 위력을 지니고 있어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은총까지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복음에 나온 장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선사하신 일을 떠올리며,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처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새로이 창조하시려는 분이심을 깨닫고 창조적인 부활 신앙을 신자들에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하게 믿게 된 사도들이 여러 가지 이적과 표징을 일으키며 거룩한 변화를 보이자, 이로 말미암아 신자들도 창조적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그 거룩한 변화의 기운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사회적 실체였습니다. 세상의 죄가 초래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회악 현상이 빈곤임을 감안하면 궁핍한 이들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는 초대교회의 거룩한 변화야말로 부활이라는 하느님 자비의 사회적인 실체였던 것이고, 하느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당신 나라로 이끄시는 창조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 


사실 사도들에게 일어난 거룩한 변화와, 여기서 비롯된 초대교회 신자들의 거룩한 변화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공생활을 비로소 상기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임을 당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느님으로서 나타나신 것일 뿐, 이미 공생활 내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비단 치유나 구마 기적 같이 믿지 않는 이들의 세속적인 눈으로도 쉽사리 확인하고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당신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5백여 년 전에 활약한 예언자 이사야가 선명하게 내다보았듯이, 진정한 메시아의 모습은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자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으로 처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 광야에서 사십주야에 걸쳐 목숨을 건 단식과 고행으로 사탄의 유혹에 맞서실 준비를 하신 후에,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바로 그 유명한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을 읽으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바로 이 대목을 고향 사람들 앞에서 봉독하신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ㄴ)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듣던 고향 사람들은 이 ‘오늘’을 자기들 나름대로 알아들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기는커녕 여전히 억압과 수탈을 받고 있으며, 그 억압과 수탈 때문에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민중이 극심한 고통 중에 빠져있는데,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이 ‘오늘’ 이루어졌다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고향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 4,28-29) 


그러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그 ‘오늘’은 공생활 3년 내내 지속되었고(루카 6,20), 마침내 초대교회에서 사도로 부활된 제자들과 그들에게서 선한 영향력을 받을 수 있었던 신자들의 공동생활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하느님의 오늘’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숨지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이 ‘하느님의 오늘’을 내다보시며,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일이야말로 메시아의 진정한 신원을 드러내는 일이었고(루카 7,22), 제자들이 사도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명심하고 깨달아야 하며 또 증거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당신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믿게 하기 위해서 40일 간이나 나타나시며 일종의 복습 교육을 시키셨는데, 사도 바오로의 증언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에 따라서 이 복습 교육의 특징을 저는 지난 부활 팔일 축제 기간 중 강론을 통해서 ‘사기지은(四奇之恩)' 교리로 전해드린 바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 사기지은


상하지 못함의 은총: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온전히 영적인 몸을 지니게 되셨으면서도 아직도 믿음이 온전치 못해 영적인 몸의 활동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시기 위해서 일상적인 육신 활동들을 여러 가지로 보여 주셨습니다. 즉, 못과 창에 찔린 상처가 남아 있는 몸으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시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 구운 물고기를 잡수어 보이시는(루카 24,41) 등 부활과 생명에 관해 말씀하시던 바를 입증해 보이셨으니, 이를 두고 ‘상하지 못함’의 은총이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19-20) 


십자가 죽음도 그분을 절대로 상하게 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하느님 나라가 비로소 다가온 것이라는 진리의 현실도 또한 세상의 그 어떤 권세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당국에 고발하던 유다인들의 박해도, 초대교회 신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공동 생활과 나눔으로써 복음을 전하려던 뜻을 꺾거나 상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빛남의 은총: 또한 예수님께서는 생전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다시 상기시키심으로써 나약하고 의심 많던 믿음을 굳세게 해 주셨으니, 이를 두고 ‘빛남’의 은총이라 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가르침이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7). 십자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지니신 진리의 빛은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빛난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미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행복과 기쁨 역시 세상의 권세는 결코 빼앗을 수 없으며, 오히려 믿는 이들이 그 영적 현실을 진리의 빛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무침의 은총: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유다인들에게 잡혀갈까봐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서 문까지 잠그고 꽁꽁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시려고 벽을 뚫고 들어가셨으니(요한 20,19), 이를 ‘사무침’의 은총이라 합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믿는 이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마음을 모아 구하는 자리에는 그 어디든지 또 언제든지 그분이 함께 하시겠다던 약속의 실현이었습니다. 이러한 통공의 신비는 특히 믿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마음을 모아 청할 때 도와주시겠다는 예수님의 각별한 보증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빠름의 은총: 더구나 부활하시어 영적인 존재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공간을 이동하는 데 있어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셨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더니(요한 20,16), 낮에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낯선 나그네 차림으로 나타나셨고(루카 24,15), 그들이 예루살렘에 숨어 있던 동료 제자들에게 가서 스승의 부활 소식과 발현 체험을 전하려던 그 자리에도 나타나셨으며(루카 24,36), 이번에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제자들을 모이게 하신 자리에 낯선 어부의 모습으로 또 나타나셨으니(요한 21,4), 이를 ‘빠름’의 은총이라 합니다. 


과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고 하시던 분이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신 바는 결코 빈 말이 아니었음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기지은과 토마스의 확인성 발현체험으로써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신앙을 역사 창조적이며 공동체적 희망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선교적 전망과 함께 이 전망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체험 위주의 선교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이러한 선교적 필요성은 후대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천명하셨고 실천하셨으며, 또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룩했던 가난한 이들과 나눔과 공동 생활을 복음 그대로 계승하고자 할 때 놀라운 성과로 나타날 것인바, 그 상징적 약속이 마지막 발현 사건에서 풍어 기적으로 나타났던 마법의 숫자 153입니다. 이 숫자로 상징되는 선교적 성과는 사기지은으로 나타난 예수 부활의 현실을 우리 믿는 이들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자 믿음을 증거할 때 실제로 가능할 것입니다.


복음화 과업에서 이룩될 하느님의 자비 현실


교우 여러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빵과 구운 물고기를 잡수어 보이신 일을 기억하십니까?(루카 24,41-43; 요한 21,12) 그것은 그분이 살도 뼈도 없는 유령이 아니심을 체험시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우리가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지만, 많은 신자들이 부활의 현실을 마치 유령 같이 대하고 있는 듯 합니다. 결국 부활 신앙으로 나타나야 할 하느님의 자비를 관념적이며 비현실적이고 죽은 다음에나 체험할 수 있을까 말까 한 내세적 신비로 밀쳐버리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니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활력이 사라지고, 교회 전체도 복음적 활력은커녕 비복음적인 내적 갈등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의 복음에서 들으신 이야기를 상기해 보십시오.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부활을 믿게 되기는 했으나 갈릴래아 호수에서 자신들의 노력만으로 물고기를 잡으려 했던 제자들이 밤새 허탕을 쳤으나,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요한 21,6)이라시던 말씀에 순종하자 그물을 끌어올리기도 힘들 정도로 큰 물고기가 많이 잡혔지 않았습니까? 또 그들은 성령까지 받은 후에는 병자들을 치유하고 죽은 이까지 살리는 기적의 능력까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부활 신앙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위력이 이러합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복음서의 증언 그대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기지은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발현을 말씀과 성찬에서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룩했던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과 공동생활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믿는 이들이 토마스처럼 발현 체험을 통해서 부활을 확신하기를 바라시며, 특히 사기지은을 통해 당신의 자비로 세상의 현실과 우리네 인생을 새로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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