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사회적 희생자들의 부활과 진실과 책임의 부활의 기록
  • 현이동훈
  • 등록 2015-04-14 11:27:02
  • 수정 2015-04-15 16:48:25

기사수정

언론의 기능이란 비판, 기록, 조명이다. 이 기능들을 통해 언론은 사회적 역할을 한다. 이 가운데 기록이 문제이다. 객관성을 요구하는 기록은 현실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많다. 주관성의 함정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힘의 영향력에 따라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교회 언론이 그런 함정에 자주 빠진다.


교회 언론은 성직자들과 연결이 돼 있기 때문에 내부 비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가톨릭신문은 원래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한 언론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성직자·수도자 중심의 기사로 이뤄진 언론으로 변질이 돼 버렸다. 그렇다 보니 교회와 사회비판 기능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성직자와 수도자 위주로 기록을 하다 보니 평신도들은 너무 적게 조명되는 문제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교회에서 현재 유일한 비판적 언론인 지금여기마저 성직자 중심의 기사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교구사제인사란이다. 교구 주보나 주류 교회언론에 실으면 그만인 이 란을 싣는다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언론은 사회의 어둠 속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조명하는 기능을 해주어야 한다. 가톨릭 신문과 평화신문은 성직자 위주의 기사들만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 평신도를 조명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소외된 사회적 희생자에 대한 조명도 성직자가 없이는 조명을 잘 하지 않는다. 


특히 장애인들의 경우는 꼭 성직자와 수도자가 붙여야 조명이 된다. 이렇다 보니 “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비장애인 기자가 잘못 기록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조명이 교회언론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내부 비판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해외교회란을 보면 성직자들의 잘못을 다루고 있는 반면, 한국 교회언론들은 성직자 잘못에 대한 비판이 인색하다. 한 번 터지고 나면 교계가 압박에 나서서 기사를 내려버린다(특히 성폭력이나 공적자금 횡령에 대해서는 말이다). 공동번역의 오역이 무려 30여년동안 지배해 오다보니 비판이라는 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일부 사람들은 교회가 그런 어둡고 불편하게 묘사하면 누가 성당에 오겠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어둡고 불편한 교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게 좋게 보일 수도 있다. 이런 드러냄은 가톨릭교회를 유지한 힘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사회의 일부이기에 사회문제에도 민감해야 한다. 이러한 기능들은 가톨릭교회 소유의 일반 언론들에 떠넘기는 경우가 많다. 교회가 두 개의 언론을 운영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서울은 평화신문 ․ 가톨릭신문-경향신문, 대구는 평화방송-매일신문) 그렇다 보니 정치·사회 분야를 교회는 책임을 가지지 못하는 반사회교리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제 곧 창간하게 되는 가톨릭프레스는 기존의 교회 신문들과는 달랐으면 좋겠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엮이지 않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먼저 나서는 것이 아닌 가난한 평신도의 울부짖음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보도에서 당사자주의를 표명하길 바란다. 특히 장애인 관련 기사의 경우 진보적 혹은 의식적인 언론마저 장애에 대한 오해를 드러낸다. 어느 언론에서 발달장애인 관련 보도를 했는데 발달장애는 뇌병변과 다른데도 포함시키는 잘못된 글로 기사를 쓰기도 했다. 교회 주류언론 또한 장애인에 대한 오보는 심각한 수준이다. 교회 안에선 장애인들이 여전히 주체가 아닌 대상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대상화 한 데는 교회 언론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나는 가톨릭프레스에 장애인 당사자 기자도 채용하길 바란다. 장애인은 사회참여와 교회참여에 대해 많은 제약이 있다. 참여를 한다 해도 구성원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심지어 한 구성원은 장애인들을 배제하기도 한다. 


가톨릭프레스가 교회 내 장애인들의 아픔을 조명해서 장애인인권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인 당사자 기자가 활동해야 한다. 장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가진 당사자 기자가 활동을 한다면 교회 내 장애인 인권에 대한 조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주체로 해방되어야 할 가난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교회언론들은 수도권의 소식들만 주로 다루었다. 가톨릭프레스로 처음 시작은 수도권이라고 한다. 문화·예술과 정치가 모두 서울로 집중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상 그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이해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지역교회 소식을 더 많이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통신원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겠다. 개신교의 어느 개혁적인 언론은 통신원들에게 문화상품권으로 정당한 대가를 대신 지불하고 있다.


아홉 명의 예수들이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 묻힌 지 1년이 다 돼 간다. 반인권세력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영원히 묻히길 바라고 있다.(나는 작년 12월 대구경북 민중언론 뉴스민에 진실과 책임의 묻힘이라고 썼다.) 예수의 부활을 왜곡하고 덮어버린 뒤 잊혀버리려는 이스라엘 기득권 세력처럼 한국의 반인권세력들도 진실을 가린 채 영원히 묻히길 바랄 뿐이다.


사도들과 복음사가들에 의해 예수의 부활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과 죽음을 전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의 진실을 폭로했다. 그것은 바로 진실과 책임의 부활이었다고 생각한다. 가톨릭프레스도 사회적 희생자들의 고통을 전함과 동시에 그들을 억누르는 반인권세력들의 진실을 폭로해야 할 것이다. 


진실과 책임이 부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가톨릭프레스 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도 추구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이길 바란다. 진실과 책임의 부활이야말로 가난한 사회적 희생자들의 부활이며 예수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300여명의 예수들이 파스카 성삼일에 차가운 바다에 묻혔다. 지금도 9명의 예수들이 책임과 진실과 함께 묻혀있다. 사회의 기득권자들, 반인권세력들, 그들과 동일화된 사람들은 책임과 진실의 예수들을 모욕하고 매도한다. 심지어 정의와 평화를 위한 교회 기구에 앉아 있으며 비실비실 웃는 얼굴 뒤에 감춰진 냉혹함을 가진 주교란 사람은 반인권세력들의 만행을 모른 척하고 있다. 


이는 교회 직권자로서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가톨릭의 현병철이 빨리 물러나길 바란다!). 이런 상태에서 부활의 기쁨을 나누자는 건 초상집에 잔치를 벌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년이 바로 이런 초상집 앞에서의 잔치라는 불편한 사회적 현상이었다. 교황방한도 그런 면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가톨릭프레스가 걷는 길은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일 것이다. 장자가 말했듯, 길은 걸어야 길이다. 걷지 않는다면 길이 아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진실과 책임의 길을 함께 글로 걷길 동참해 본다. 힘들고 지칠 수도 있을 험난한 길이지만 목적에 닿아서 서로 웃으며 다시 걸을 수 있는 사회적 희생자들의 길동무가 되어주길 바란다. 


법의 폭력과 배신, 교계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과 책임을 전하여 사회적 희생자들의 부활을 알리는 데 좋은 몫을 다하길 바란다. 나는 가톨릭프레스에 다음과 같은 복음 말씀을 선물로 전한다.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1, 42)


나도 기쁘게 이 글로 가톨릭프레스와 함께 길을 걸어본다. 힘이 들겠지만 함께 나누며 걷는다면 기쁠 것이다.


덧붙이는 글

현이동훈 (안토니오) : 가톨릭 아나키스트로 아나키즘과 해방신학의 조화를 고민하며 실천하고 있다. 장애인 인권과 생태주의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2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