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구세사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기록한 이스라엘 역사이다. 성서가 계시하는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서서 인류의 모든 민족과 함께, 민족 안에 계신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분단된 한반도의 땅에서 성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과거에 어떻게 우리 조상들 세대와 함께 하셨는지, 지금 어떻게 우리 민족의 현실에 함께 하시는지를 끊임없이 숙고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오늘날 성서를 배우는 종교인들이 성서상 이스라엘 역사를 알기 위한 노력은 기울이면서 정작 우리 민족사, 특히 일제 침탈의 수난사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육화된 하느님 말씀으로서 성서를 만날 수가 없다.
자기 민족의 과거사와 현실의 상황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함께 하고 이끄시는지를 깊이 숙고할 때 비로소 성서는 살아있는 말씀, 지금 우리를 구원하는 말씀으로 역동성을 갖게 된다. 지금 우리 현실은 일제의 침탈의 시기에 버금가는 독재자의 억압 시기를 겪고 있다. 과거를 반추해보며 과오를 반복하지 말자는 차원에서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실상 한국 교회 개혁은 민족을 반역한 친일역사 청산에서 출발해야 한다.
뮈텔주교 일기에는 일제의 탄압시기 동안 한국교회가 민족 독립을 거부하고 일본 제국의 악한 권력을 위해 수족이 된 사실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교회의 친일행위를 부끄러움없이 기록하고 있다. 초기 100년간의 박해시대 역사는 교회가 민족의 고통에 함께하며 특히 가장 낮고 비천한 이들과 함께하는 예수의 모범을 살았지만, 박해 이후의 교회는 권력자들과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질되고, 민족의 수난을 철저히 외면한 사두가이와 같은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뮈텔과 한국 천주교의 친일」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종교전문 한겨레 조연현 기자는 2011년 9월 21일에 쓴 기사에서 ‘용산 신학교 신학생들이 1919년 3.1 항일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자 주교에게 허락을 받고자 뮈텔주교를 찾아왔다.
뮈텔주교 일기를 보자.
“그들은(용산 신학교 신학생들)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하고 발을 구르기고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주교는 용산 신학교 학장신부에게 신학생들이 3.1 만세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엄중한 지시를 내렸다. 1919년 3월 1일, 다섯명의 신학생들은 주교의 명을 따르지 않고 전국적인 항일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결국 시위에 참여한 신학생들은 모두 퇴교 조치를 당하고, 주교는 용산 신학교 학장신부에게 신학생들의 불순명에 대한 처벌로 임시 휴교령을 지시하였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신학생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민중들의 독립투쟁 대열에 서고 싶었지만 교회지도층은 단호히 반대하였다. 신학생들은 훗날 누구를 위해, 왜 사제가 되어야 하는지 정체성의 혼란이 극심하였을 것이다.
주교는 양심과 신앙에 따라 인간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려는 신학생들을 칭찬하고 격려함이 책임자로서의 마땅한 도리인데, 오히려 이웃의 고난을 외면하고 “함부로 나대지 말고 가만있으라”고 명령하였으니 도대체 그런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이 침몰하는 배에 갇힌 탑승자들에게 아무 대책도 없이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하고 자기들만 살아남기 위해 도망친 범죄자처럼 일제 식민지하의 교회지도층은 신부들과 신자들에게 일본을 상대로 독립 투쟁을 금기시하고, 어떤 항일 운동도 못하도록 “가만히 있으라”고만 강요하였다.
항일 운동에 가담한 신도들은 교회의 단체 직책을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 독립 활동을 위해서 결국 교회를 떠나야만했다. 실제로 뮈텔주교는 안중근을 살인자로 규정하고 성사를 금지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빌렘 신부는 사형을 앞둔 본당 교우의 성사 요청을 받아들여 뤼순감옥까지 찾아가서 성사를 집전해주었다.
일제하의 교회지도층은 단 한번도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지 않았다. 교회를 보호해주겠다는 일본의 악한 권력자의 취임식(지난주 기고문에서 - 이토오 통감 취임식에 참석하고 만찬에 참석한 주교와 신부들)에 참석하고 친밀하게 어울리면서 민족의 운명은 일본의 손아귀에 넘겨주었다.
민중은 억압받고 희생을 당해도 교회만 잘운영되고 번영하면 된다는 태도로 인해 교회는 민중들의 희망이 될 수 없었다. 교회가 일제 권력과 가까울수록 민중들은 교회와 멀어져갔다. 일제 시대의 교회는 예수없는 교회였다.
뮈텔주교는 한국민족을 향해서는 일제에 순응하기를 강요하면서 자신의 국가 문제에 대하여는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하였다. 1914년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동맹국들과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뮈텔은 한국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 33명 중 11명을 프랑스 국가를 위해 군대에 징집시켰다. 이들은 무려 5년동안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한국민족이 일제에 침탈당하며 고통을 당하는 일에 대하여는 “가만히 있으라”고 한 인물이 프랑스 자국에서 전쟁이 발생하니 싸워 죽으라고 전쟁터로 보낸 인물이 한국교회 조선 교구장으로 43년동안을 사목을 하였으니 교회는 민족 앞에서 어찌 얼굴을 들 수 있는가?
한국 천주교회의 항일 운동사는 국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해외의 신도들이 일으킨 항일 투쟁은 찬란하게 남아있다. 성직자들의 신학교 교육과정은 민족의식과 동떨어진 학문과 수련이었다는 반증이다. 지금도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도대체 교회는 왜 고난받는 민중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가?
3.1 만세 항일 운동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신학생들을 쫓아낸 뮈텔주교의 후예들이 아직도 교회의 자리에서 서슬 퍼렇게 군림하지 않는가? 지금 유신독재 잔당들의 패악질로 인해 민주주의는 파탄나고 수많은 국민들이 고통속에서 살지만 종교권력자들은 끊임없이 “가만히 있으라”, 세월호 참사의 아픔에 대해 “가만히 있으라”를 요구하고 있다.
과연 예수가 지금 한국 국민들이 겪는 비참과 불행에 대하여 교회를 향해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