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부유한 기업인이었던 엔리크 쇼(Enrique Shaw)에 대한 시복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CNA(Catholic News Agency)는 3일 쇼의 시복에 대한 아르헨티나 교구 차원의 절차는 끝났다고 보도했다.
이 절차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 시절 시작됐으며, 교황은 로마에 시복 절차 진행을 요구했었다고 시복청원자인 후안 나바로 플로리아는 밝혔다.
교구 차원의 절차는 2013년 마리오 폴리 대주교 밑에서 완료됐으며, 이를 넘겨받은 교황청 시성성이 올해 안에 진행 단계에서의 법적인 유효성 여부를 선언할 예정이다. 쇼에 대한 시복절차는 현재 바티칸에서 진행 중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3월 멕시코 TV방송인 텔레비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부자 기업인에 대해 시복절차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황은 쇼는 부자지만 성스러웠다며, 하느님은 사람에게 돈을 주었고, 사람은 그것을 잘 관리할 수 있는데, 쇼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단지 온정주의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1921년생인 쇼는 젊어서 해군에 근무했으며, 2차 세계대전 후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1952년 기독실업인회를 설립했으며, 아르헨티나 가톨릭대학 설립자 중 한명이었다. 아르헨티나 가톨릭행동의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955년 후앙 페론 정권 초기 반(反) 가톨릭 분위기 속에서 희생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체포되어 수감된 후에도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시복청원자인 나바로 플로리아는 밝혔다. 동료 수감자들에게 그의 가족이 가져온 음식 뿐 아니라 침구도 나누어주었다.
그는 연금 기금과 건강보호시스템을 만들었다. 3만 4,000명 산업노동자들에게 의료서비스와 재정지원을 실시했다. 또 결혼, 출생, 사망 등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는 대부를 해줬다.
1961년 그가 경영하는 기업이 미국 자본에 넘어가 1,200명의 종업원이 해고 위기에 처했다.
당시 그는 이미 암이 상당히 진행돼 결국 그 다음해 죽었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끝까지 해고를 반대했고, 모든 종업원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회생계획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 가정과 가족을 중요시 했다. 딸인 사라 쇼는 아버지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지가 저녁에 집에 돌아올 때의 그 기쁜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사업가였음에도 저녁을 밖에서 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저녁을 그토록 즐거워했다. 당연히 묵주기도와 미사 참석은 빼놓을 수가 없었다.
기독실업인회 회원이자 시복청원인 중 한 사람인 페드란 데 엘리잘데는 쇼는 매우 성스럽기까지 했다며, 우리는 앞으로 세계 최초로 기업가 출신 성인을 갖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쇼가 비즈니스를 진정으로 교회의 사회교리와 일치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말년에 그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기증한 혈액을 수혈 받았다. 병원 관계자들은 그가 입원한 병원 앞에 헌혈을 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노동자들을 보고 놀랐다. 병원 측은 처음에 그들이 헌혈하려는 대상이 노조 지도자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 대상은 바로 그들의 고용주였다.
쇼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참 행복하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노동자들의 피가 내 혈관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62년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