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번 주중이나, 다음 주가 되면, 거의 대다수의 학교들이 개학을 한다. 여름휴가, 여름 방학도 다 끝나고, 직장인들은 직장으로, 학생들은 학교로 되돌아오는 주간,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주간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한창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면서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이 시점에서 어수선했던 우리 복산 성당 공동체도 다시금 옷맵시와 마음맵시를 가다듬고 제자리로 찾아 와야 할 때인 듯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난 주 토요일, 광복 70주년이자,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해서 우리 복산 성당에서 치루었던 일일 호프는 우리들 간에는 일치와 친교를, 하느님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시간,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의 시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다. 벌써 1주일이 지나가 버렸지만, 일일호프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수고해주신 모든 분들, 특히 우리 복산 성당 청년회와 me 가족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의 말씀들은 2015년 상반기 동안 이 나라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정의와 인권과 환경과 생명에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 시대의 아픔과 슬픔에 다소 안일하고, 풀어 헤쳐진 채 반응해왔던 교회, 바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 태풍처럼 다가온다.
2015년 새해가 밝고, 오늘 8월 23일까지 8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교회 안팎에서 벌어졌다. 때로는 몇몇 일들에 우리는 우리들의 눈길을 주기도 하고, 우리들의 관심과 걱정과 애정과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때로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그렇게 무관심했던 때도 있었다.
분명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하느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하고 계셨다. 그 뜻들은 대부분, 우리들 대다수를 불편하게 했고, 조용히 침잠하려는 우리들을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종용하기도 했고, 때로는 우리들의 속을 까뒤집어 놓기도 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는데, 지난 상반기동안 주일의 독서들과 복음들은 대부분 우리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소식으로,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어떻게든 우리를 종용케 하는 소식으로 다가 왔다.
그런데,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들은 이러한 우리들을 고발하고, 우리들을 완전히 발가벗긴다.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 하여라 »라고 일갈한다.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 아모리족의 신들, 그 신들은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허상들이다. 소위 좋은 말만 하는 신들, 마치 힘겨운 삶의 고통을 견디어 내게 하는 용기와 힘을 주는 신이 아니라, 고통을 잊게 하는 모르핀이나, 아편을 주는 짜가 신이다. 혹은 하느님의 말씀들 중에서 적당히 자기에게 이로운 것만을 골라서 믿으려고 하는 약삭빠른 자들이 믿는 신, 바로 짜가 신이다. 여호수아의 말이 그저 3800년 전의 말이겠는 가 ? 오늘의 우리들을 두고 하는 말 아니겠는가 ?
더 나아가, 오늘 복음에서 « 내 말이 귀에 거슬립니까? »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비단 당신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는 제자들, 그래서 예수님께 «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 » 라는 볼멘소리를 해대는 제자들에게만 던지는 물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미사를 참례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 당신들도 떠나고 싶습니까? » 라는 물음도 또한 예수의 열두 제자에게만 해당되는 물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물음이다.
« 내 말이 귀에 거슬립니까 ? », « 당신들도 떠나고 싶습니까? »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런 물음들이 우리들 속을 파고들고, 우리들 속을 헤집고, 마침내는 우리들 속을 다 뒤집어 놓는 것 같다. 정녕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크나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 내 말이 귀에 거슬립니까 ? », « 당신들도 떠나고 싶습니까? »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결국 « 당신들은 정녕 끝까지 나와 함께 하겠습니까? » 라는 물음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어중이 떠중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났다. 그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은 예수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감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자기네 삶에 도움이 될 만한 물질적인 무언가를 바랬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욕망과 그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베드로도 될 수 있고, 유다도 될 수 있는 우리다. 큰소리 떵떵 쳐놓고, 실제로는 뒤꽁무니로 빠져버린 베드로, 기대와 희망을 저버렸다고, 눈길 돌리고, 마음 접어버리며 급기야 사랑했던 사람마저도 배신하고, 그를 죽음의 길로 내쳐버리는 유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관심도 없이 그저 방관자로만 머물러 있다가 자기에게 손해가 끼칠 징조가 보이면, 언제라도 도망가 버리는 나머지 제자들, 그들의 모습들이 바로 우리들의 내면에 있는 우리들의 또 다른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을 때, 그 십자가 아래를 지키던 이들은 똑똑하고, 빠릿빠릿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큰소리 뻥뻥 쳐대던 사람들도 아니었다. 어중이 떠중이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한 이들이었다. 예수의 어머니와 또 다른 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사랑 받던 제자뿐이었다.
십자가의 길에서 내가 만약 거기 예루살렘에 있었다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
예수를 조롱하던 로마 군인들 틈에? 예수에게 침을 뱉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던 군중 틈에? 십자가를 지고 가던 피 흘리는 예수를 보며 눈물짓는 여인들 틈에? 예수의 얼굴을 닦아주던 베로니카 옆에? 예수와 함께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그 겸손한 이들 옆에? 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분명한 것은 « 내 말이 귀에 거슬립니까? »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십자가의 길 위에서 내가 서있는 자리도 달라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