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서 순교자의 맥을 이어준 이들은 고난 받는 민족과 함께한 신도들이었다. 반면에 주교와 신부들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며 총독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순교자들과 결별하고 불의한 압제자의 수족이 되어 일제에 철저히 봉사하였다.
한국교회의 주교들이 총독부의 친구로서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역사적 사실들은 차고 넘친다. 대표적인 사례 한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발생하고 일제는 문화통치로 전환하기 위해 총독을 교체한다. 조선의 총독부 3대 총독으로 임명된 자가 사이토 마코토 남작이다. 사이토 부임 3년 후인, 1922년 4월 로마 교황청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부인 마쓰미야, 정무총감 미즈노에게 성 실베스텔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들에게 포상을 한 이유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주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데 대한 답례가 포상 이유였다. (뮈텔주교 일기)
성 실베스텔 훈장은 로마 교황이 문화‧사회복지 공헌자에게 주는 명예 훈장이다. 교황청과 한국 주교들이 사이토 총독에게 문화와 사회복지에 공로가 인정되어 교황훈장을 수여한 것은 성직자들이 반민족 친일행위에 앞장섰는지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1858-1936)은 누구인가? 그는 역대 조선 총독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총독직에 있던 인물이다. 그는 1919년 8월13일에 부임하여 1927년 12월10일까지 무려 8년 넘게 총독직에 있었다. 다른 총독들의 임기는 평균 2-3년 정도였지만 사이토 마코토는 8년 이상 총독직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일본 천황이 인정한 한국 식민지 통치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전국에 시달한 교육시책에서 다음과 같은 ‘신교육 칙어’를 지시하였다.
「먼저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잃게 하고, 조선인의 조상과 선인의 무위, 무능과 악행을 들추어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들의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그 부조(父祖, 아버지와 조상)를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同化)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사이토 총독은 1922년 4월에 우리 민족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설립한 인물이다. 사이토가 이 회의에 직접 참여하여 조선사 편찬 사업의 중대성을 강조하는 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의 민족혼과 역사, 민족 문화를 말살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에게 한국 주교의 추천으로 교황 훈장을 수여하였다는 사실은 한국천주교회가 반민족 범죄행위에 얼마나 깊숙이 간여하였는지 실로 부끄러운 교회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민족과 역사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15년 전인 구세주 강생 대희년 2000년에 발표한 과거사 반성문은 일제시대의 역사에 대해 '민족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지 못했다'는 단 두 줄짜리 문장으로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으로 내용으로 매듭짓고 말았다. 진정성이 담긴 과거사 반성문으로 볼 수 없다.
교황청은 『2000년 대희년 준비에 관하여』라는 교서를 “교회는 과거의 과오와 불충한 사례들, 항구치 못한 자세와 구태 의연한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하도록 노력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한국교회는 아직까지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최근 흥행하는 영화 '암살' 속 전지현 실존 인물 일까?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는 항일투사 남자현 지사이다. 남 지사는 1925년 사이토 조선 총독 암살을 시도했었고, 만주에서 혈서로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