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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닷컴] 사실과 진실, 그리고 화쟁
  • 우희종
  • 등록 2015-10-05 15: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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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10월 2일 불교닷컴(http://goo.gl/8wegCw)에 올라온 기고문입니다. 




조성택 교수의 사실과 진실에 대한 글(관련기사: [화쟁시민칼럼]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을 읽으면서 그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크게 두 가지 우려가 들어 글을 쓰기로 한다. 필요하면 서로 견해 차이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도 좋을 듯하다. 


우선 사실과 진실에 대한 표면적 이해가 있다. 비록 일반인들은 사실과 진실이란 말을 혼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사실은 사물의 이치인 사리(事理)에 근거한 것이고 진실은 진리(眞理)에 의한다. 사물의 이치를 탐구한 지식체계가 이해에 근거한 학문이라면, 진리를 추구해 통찰에 의한 지혜를 밝히는 것이 종교라 할 수 있으며, 금강경을 포함해 여러 경전에서도 ‘진실되다’는 표현이 수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비록 진리를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워도, 진실은 시대와 문화를 떠나 우리가 늘 수용하고 인정하며 삶의 가치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통찰과 직관에 의한 체험을 통해 성찰과 감사가 수반된 생의 긍정적 욕망을 되찾아 행복을 우리에게 준다. 이는 앞으로 몇 백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항상 같은 기쁨을 주게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사실이란 ‘특정 집단 내에서 다수(majority)가 믿고 수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의 대표적 사례로서는 과학적 사실이나 사법적 사실이 있는데, 이는 그 당시 주어진 증거들을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사실로 자리 잡는다. 중세 때의 편평했던 지구 모양이나 천동설, 마녀재판이 그랬고, 이제는 조작된 것으로 밝혀진 인혁당 사건이 그러하다. 갈릴레이가 화형에 처할 뻔한 것도, 무고한 수많은 여인이 마녀재판으로 처형된 것도, 군사독재시절에 사형 판결 후 18시간 만에 집행된 사법살인도 비록 진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것이 당시에는 사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처럼 사실로 이루어져 있기에 사회에서는 다수가 믿는 사실이 곧 힘이자 권력이다. 이는 세상에서 논란이 있을 때 언제나 진실이 아닌 사실이 승리함을 의미한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개인이나 집단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다양하게 포장하고 여론몰이를 통해 왜곡된 사실 만들기에 열중한다. 이처럼 진실과 사실은, 언제나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늘 같은 것도 아니라서 고통을 유발한다. 


그러나 사실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부처님은 그것이 단지 다수가 믿는 상(相)에 불과함을 지적하며 속지 말기를 강조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끊임없이 수행하여 삶에 자리 잡은 사실과 진실의 틈새에 대한 깨어있음으로,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고통 속 사실의 세계로부터 진정한 진실의 세계에 눈을 떠, ‘이고득락(離苦得樂)’과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삶으로 회향하라는 것이다. 


조성택 교수가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어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소설 라쇼몽의 예를 들면서 사실과 대비시켜 거론한 ‘나만의 진실’에 대한 근거를 학계에서는 개인의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라고 부르며, 이는 사실과 진실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다. 


그것은 단지 개인 나름의 선악이나 기호 판단의 근거일 뿐, 진실도, 사실도 아니며 불교식으로 말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하는 육근에 의해 만들어진 개인 허상에 불과하다. 조 교수는 진실에 대한 체험이 주관적이라는 점에서 ‘나만의 진실’이라는 개인의 주관적 ‘제한된 합리성’을 사실과 대비되는 진실로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조 교수는 주관적 입장을 넘어선 ‘단 하나의 객관적 실제’를 사실이라 정의하지만, 이때의 객관성 역시 다수의 공통된 주관에 불과할 뿐 주관이 다수 모인다 해서 각 구성원의 주관적 한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계가 있는 주관이 다수 모여 보았자 여전히 그 한계는 있는 것으로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 


다시 말하면 객관이라고 하는 것도 육근이 지닌 주관적 한계는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이런 객관적 실제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다수의 실제’일 뿐이다. 편평한 지구가 둥근 지구로 되는 것과 같고, 이 또한 과학의 발전에 따라 언제고 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과 같다. 


종교적 체험이 지극히 사적 체험인 것처럼 진실은 육근에 의한 이해나 언설로 이뤄질 수 없고 개인의 통찰을 통해 체험될 수밖에 없기에 분명히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어와 이해로 접근되지 못하는 주관적 체험이라고 해서 알 수 없거나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육근에 의한 이해만이 전부라고 하는 매우 어리석거나 육근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생각이다. 


비록 주관적 성찰과 통찰을 통해 이뤄지지만, 시대와 문화를 넘어 변하지 않는 진실은 육근에 의한 다수의 이해나 인정과는 상관없이, 사실의 근거가 되는 육근이 지닌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그것을 뛰어넘음으로서 접근된다. 이러한 체험은 시대와 문화를 떠나 같은 경험을 한 이들에게는 자명하게 공유될 수 있는 분명함이 있다. 


한편, 이런 혼동이 있기에 조성택 교수의 화쟁(和諍)은 극히 좁아진 범위에서 전개되는 아쉬움이 있다. 화쟁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이야기에 있듯이 육근에 의존한 우리들 인식체계의 한계를 지닌 관점(사실)은 종종 있는 그대로의 모습(진실)을 보지 못하기에 ‘옳지만 맞지 않음(개시개비 皆是皆非)’을 지적한 후, 서로 열린 자세를 통해 각자의 한계를 인정하고(파사 破邪)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실상에 대한 총체적인 바름을 드러내는(현정 顯正) 과정이며,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회통해 요익중생으로 이어진다. 


화쟁의 출발점은 세상은 각자의 입장에서 다양하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인식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나만 옳다고 전제하거나 상대방이 틀렸다고 전제하고 진행하는 화쟁 논의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쟁 논의를 계속해서 옳고 그름의 분열과 갈등의 형태로 파악하고 전제한다는 것은 스스로 화쟁에 대한 논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더욱이 서로의 한계를 드러내어 인정할 수 있어야 진정한 화쟁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갈등에 적용할 때 더욱 필요한 과정이다. 서로의 부족하고 잘못된 한계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지 않은 화쟁 논의란 무의미하고 그야말로 진영 논리 속의 투쟁이 된다. 서로의 부족하고 잘못된 부분에 대한 성찰과 인정 과정이란 파사현정의 파사로 표현되기에 파사 없는 화쟁은 이뤄지지 않으며, 이때의 파사는 상황의 옳고 그름이나 선악이 아닌, 고통의 문제로 바라보며 서로의 이고득락을 위한 과정으로 풀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최근 화쟁아카데미가 주최해 열린 화쟁 토론회에서 필자는 화쟁을 이야기할 때는 나만 옳다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전제에서 논의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야 했으며, 동참했던 승려가 자신 입장에서는 결코 부족함이 없고, 지적된 부분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합리화하는 상황에서 화쟁 논의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한편, 조성택 교수의 사실과 진실에 대한 혼동과 이에 기반한 화쟁의 부분적 이해의 근저에는 서양의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옳고 그름이라는 근대 철학의 입장과 더불어 불교를 ‘이고득락’의 수행 아닌 이해로 받아들인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양문명에서 이해에 의해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이성에 의한, 소위 객관적 사실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던 논리실증주의자들 내지 실증적 과학적 사실만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경험주의 방식은 불교의 깨달음도 이해나 지식으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조계종 교육원장 수준의 논리와 맥을 같이 한다. 


불교에서는 육근에 의한 사실로 이뤄진 세상 속에서 전도몽상의 허상인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을 넘어 사실과 진실의 틈새를 바라보아 속지 않는 깨어있음(覺)을 강조한다. 특정집단이나 사회의 다수가 인정하는 사실의 세계를 넘어 시대와 문화를 떠나 변치 않는 진실에 대한 지혜는 안이비설신의로 구성되는 언어나 이해로 이루어진 사실적 지식으로 접근될 수 없다. 아무리 듣기 좋은 포장과 미사여구로 여론몰이를 통해 다수가 믿는 왜곡된 사실을 만들어 낸다 해도 이는 고통을 만들어 내는 허상이지 결코 진실이 아닌 것과 같다. 단순한 이해로 사실과 진실, 그리고 화쟁을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우희종 | 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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