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8일 일요일, 맑음
오늘 중으로 텃밭의 풀을 다 매고 꽃씨를 뿌려야 하는데 6시가 넘어도 먼동이 터오지 않는다. 내일 떠날 여행가방을 싸면서 동트기를 기다리다가 회색이 좀 가시자 엉덩이에 방석을 달고서 텃밭으로 내려갔다. 땅바닥을 기며 풀과 엉키는 샅바놀이는 씨름판과 또 다르다. 뿌리 채 캐내는 덴 호미보다 낫이 나아서 정신없이 휘두르긴 하지만 그러다 보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도깨비와 씨름을 하는 기분이 든다.
아무튼 오전 9시경에는 언덕진 곳의 풀은 다 뽑았다. 그 다음 차례는 양파를 심으려고 비닐 멀칭을 해둔 밭고랑의 풀이다. 일이 한창일 무렵 보스코가 일손을 돕겠다고 내려왔는데 흰 바지를 입고 있다! 세상에! 그 바지에 흙물과 풀물이 들면 대책이 없어 복장불량을 지적했더니만 “그럼 당신이 해!” 하면서 올라가버린다. 정오가 다 되서야 전순란의 인간승리로 풀매기를 마쳤다.
‘집나갔던 며느리가 돌아오게 만든다’는 가을 전어를 굽고 호박된장찌개를 끓여서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진안 사는 최종수 신부님이 그곳에 온지 8년 만에 부귀공소에서 일대의 어르신들에게 경로잔치를 베푸신다면서 보스코 더러 오시라는 신신당부가 있었다. 스.선생 부부가 함께 가는 길이어서 호미질 낫질로 시큰시큰한 손목으로 운전까지 하는 수고가 덜어져 다행이다. 스.선생은 공소식구들이 어딜 가나, 우리랑 어딜 가더라도 쾌히 차를 내놓고 운전을 도맡는 넉넉한 분이다.
진안본당 부귀공소는 널따란 담장 안에 건물도 반듯하고 성가소리도 우렁차 본당이 되고 남을 곳이다. 최신부님의 미사가 끝나고 여흥을 하는데 ‘인디언수니’(공소신자 사회자가 ‘인디언 수녀님’이라고 소개하였다)가 와서 어르신들에게 흘러간 노래를 불러드렸다. ‘두만강’ 푸른 물을 건너서 ‘대전발 0시 50분’ 차가 목포로 떠나더니만 ‘목포의 눈물’을 흘리고 ‘백치 아다다’는 더 서러웠다.출연료로 고추장 한병 된장 한병 간장 한병을 받았기에 한병에 한 곡씩을 불렀고 덤으로 벙어리 여인이 왔다.
공소회장이 마술을 배워 시연하는, 서툴기 짝이 없는 마술공연도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고, 최신부님이 무대에 올라 ‘내 얼굴이 텔레비에 나왔으면 좋겠다’는 재롱을 부리고, 이어서 가야금, 대금, 아쟁, 판소리로 이어졌다. 선비들의 악기였다는 가야금 힘찬 연주가 처녀의 가녀리고 기다란 손가락에서 민들레 홀씨처럼 퍼지는 게 황홀했다. “떡과 국악이 좋아지면 나이가 드는 증거”라던데...
공연 후 최신부님이 전에 계셨던 팔복성당 교우들이 삶아내는 손짜장과 최신부님의 팬들이 전라도 각지에서 장만해온 시루떡과 홍어와 닭발,동동주로 푸짐한 잔치상이 벌어졌다. 어르신마다 손목시계와 블루베리식빵과 만두, 양말을 선물로 받고 흥겨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한 사제가 신명나게 살면서 영성을 펼 적에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행복해지고 관대해지며 향상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 대신 어리석고 미숙한 언행을 보이는 사제 하나가 잘나가던 공동체마저 분열시키고 파괴하여 신자들을 낙담시키고 냉담시키는지도 요즘 곳곳에서 목격하는 중이다. 오죽 하면 교우들이 기도에 기도로 정성을 다한 끝에 주임신부가 바뀌었다고 춤을 추고, 어제 만난 남해 형부는 '갑질을 해대는' 고약한 사제가 있는 본당에 미사 갈 적마다 ‘산티아고 순례를 가는 고행'이라고 탄식하겠는가! 프교황님 말씀대로 어떤 경우에도 신부들의 갑질은 용납 될 수 없다.
티 없이 해맑은 얼굴에 선량하게 커다란 눈을 하고 부귀면 금계곡에서 농민들의 공동체와 영성치유를 꿈꾸는 최신부님이 그 꿈을 이루도록 기도하며 밤길을 도와 집으로 돌아왔다. 남의 일 같지 않아 아침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백성의 길잡이가 되고 일치의 중심이 되게 하소서"라고 빵고신부를 위해 기도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부귀공소 잔치에 오신 김원장님은 부인 문섐이 멀리 볼로냐에 있어 좀 쓸쓸해 보이지만 '노는 재미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면서 임실 치즈와 선물을 한보따리 내게 안겨 주신다.
밤에 보니 한신 선배 안계희 전도사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떴다(92세). 엄마와 같은 실버타운 ‘유무상통’에 계셨으나 아들 사는 곳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사시다 돌아가셨다. 여동문회 후배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시던 저 선배님이 오래오래 교회에 헌신해온 삶을 주님께서 상주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