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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부인·신학자의 아내·사제의 어머니, 저는 전순란입니다 - [인터뷰] 10년간 공개일기를 써온 휴천재 전순란 여사
  • 염은경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08-23 19:13:18
  • 수정 2019-08-23 19: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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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순란 여사와 성염 교수 ⓒ 문미정


“눈 녹을 적 수선화처럼 노란 옷을 입고 나타나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던 처녀는 자기의 결혼을 한 주일 앞두고 집을 뛰쳐나와 내게로 왔다. 서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서 이룬 사랑이었기 때문인지 우리는 내내 행복하였고 지금도 그러하여 둘을 맺어주신 성모님께 저녁마다 감사의 로사리오를 바친다.” - 아내 전순란 여사를 소개하는 성염 교수의 글 중에서 



지리산 어느 골짜기, 강물도 속도를 줄이고 쉬어가듯 흐르는 곳 휴천(休川)을 공책삼아 지난 10년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매일같이 <지리산휴천재일기>를 써온 전순란 씨. 외교관의 아내로,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면서 가톨릭사제의 어머니로, 신학자의 동반자로, 그리고 스스로 여성신학자이면서 학구파농군으로 살아온 그간의 인생이야기를 그녀의 생생한 목소리로 직접 들어 보았다.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각오로 공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가톨릭프레스> 독자들에게 전순란 여사님은 <휴천재일기>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10년간 매일같이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셨는데 특별히 일기를 사람들에게 공유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남편과 저의 주 생활권은 지리산 휴천재(休川齋)에요. 주민등록도 되어 있는 ‘함양사람’이지요. 로마에서 돌아올 때 짐을 모두 그곳에 풀었는데 외지와 단절되어 있는 곳이라 친구와 주변 지인들이 제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 궁금해 했어요.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하루생활을 정리하면서 저녁에 글을 쓰기 시작하니 하루하루를 더 깊이 있게 돌이켜 보며 살게 되더라고요. 내 삶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소통’하고 싶은 마음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전순란 여사의 남편 성염 교수는 교황청립 살레시안 대학교에서 라틴어문학 박사학위를 받아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2003년부터는 교황청주재 한국대사를 지냈다. 대학원시절부터 외교관으로 지낸 시간까지 도합 14년의 외국생활을 끝내고 성염 교수와 전순란 여사는 2007년부터 지리산 휴천재에서 본격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전순란 여사는, 생활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있을 정도로 부끄럽지 않고 투명하게 살겠다는 각오로 공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써 보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에서 시작된 휴천재일기는 꼬박 10년 동안 단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약속을 지켰다. 



장로님 집안에서 나고 자라 1969년도 한국신학대학교에 입학, 한신대 총학생회 부회장까지 지내셨습니다. 그 시절 여성이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어떻게 신학교에 입학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다닐 적엔 제가 생각이 참 많았어요. 감리교 계통의 미션스쿨이었는데 당시 교목이셨던 선생님과 친했습니다. 선생님께 자주 책을 추천받아서 읽었고 책을 읽은 후에는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너는 신학, 철학에 관심이 많으니 신학교를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당신은 감신대 출신 목사님이면서도) 내게 한국신학대학교를 추천해 주셨지요. 당시 한신대에는 김정준 학장님과 안병무 교수님을 비롯해 이우정, 문익환, 문동환 등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기 때문에 그분들께 배우면 좋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경기도에서 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신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시골 학교 사택에서 살았으므로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난후 사방이 조용했다. 염소를 기르던 시절이라 풀을 먹이러 산 속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나는 이 산속에 갇혀서 이대로 머무는 게 아닐까? 더 큰 세상을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전순란 여사는 어린 시절부터 미래에 대한 호기심, 더 넓고 큰 세상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박정희 시대에 한신대를 다닌 전순란 여사는 당시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선생님들로부터 종교가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책상 앞에서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신학이 사회에 어떤 누룩의 역할을 하는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 갈 수 있는지 사회 참여를 공부하게 됐다. 



개신교 여신학도와 가톨릭 부제 예정자의 우연 같은 운명


▲ 우이동 집 정원은 전순란 여사의 사랑과 정성으로 온갖 생명들이 나고 자랐다. ⓒ 문미정


가톨릭에서 부제품을 앞두고 있는 남자와 개신교 여신학자의 만남은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한 러브스토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분은 난관을 이겨내고 가정을 이루어 지난 40여 년간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며 조화롭게 살아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1972년 봄 서울 우이동 천도교 교당에서 열렸던 종교제(宗敎祭)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각 종단 대학교를 대표하는 학생들을 초대한 모임이었는데 저는 한신대 부회장으로서 개신교 신학대학들을 대표해서 초청받고, 남편은 가톨릭 신학대학들을 대표해서 초청받아 참가했어요. 당시 남편은 대학원생이어서 그 자리에 참석할 자리가 아니었는데 원래 참석하기로 했던 학부 학생회장이 ‘시험기간이니 선배님이 대신 가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참석하게 됐답니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오락시간에 무슨 게임을 하는데 그이가 제 곁에 앉았대요. 자기소개 게임을 하면서 내 무릎을 탁 치는 순간 ‘아. 내 짝이다!’라고 예감이 들더랍니다. (웃음)


두 사람의 운명 같은 인연은 이렇게 우연처럼 시작됐다. 성염 교수는 당시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부제품을 앞두고 있었고, 개신교 신자인 전순란 여사는 약혼자가 있는 몸이었다. 매우 평범하고 안정적이던 약혼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전순란 여사는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미진함으로 고민하던 터였으므로 둘은 급속히 가까워졌단다. 


이듬해 4월, 부활 사순시기. 두 사람은 각각 부제품과 결혼식을 앞두고 마음을 ‘정리’하기로 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정리하자는 뜻인 줄 알았던 여인은, 어렵게 마음을 다잡고 약속되어 있던 대로 약혼자와 결혼하기 위해 청첩장을 찍었다. 그런데 부활절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남자는 ‘마음 정리가 다 되었노라!’고 했다. 그는 사순시기동안 깊은 고민 끝에 사제의 길을 접고 여인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이다! 


꽃 피던 4월, 화계사에서 그렇게 다시 만나 결혼을 다짐한 두 사람은 소설같은 우여곡절 끝에 그해 가을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었다. 성염 교수는 어려서 모친이 돌아가신 후 살레시오 신부님들의 손에서 자랐고 그러다 그분들의 삶을 본받아 사제가 되는 길로 들어섰다. 사제의 길이 집이었고 가족이었고 울타리였을 그가 그 길을 포기하고 한 여인과의 삶을 택하기까지의 깊은 고민을 전순란 여사는 모두 이해했다. 


청첩장까지 나온 마당에 결혼을 깨고 집을 나간 딸로 인해 친정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쓰러지셨고, 집안의 반대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을 겪어내며 맺어진 인연이기에 두 사람은 누구보다 깊이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할 일만 남았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45년 넘게 두 사람은 그 깊은 사랑을 아름답게 키워가고 있다. 

 


2010년 둘째아들이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처음, 사제가 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심정이셨나요?


저희는 주일이면 주로 성당엘 갔어요. 성당에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있잖아요? 개신교에는 성찬의 전례가 없어서 뭔가 빠진 것 같이 느꼈고 온 가족이 한 교회에 가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좋을 것 같아 주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저는 영성체후 묵상을 할 때는 갈라진 교회에 대한 묵상을 해요. 교회가 별것도 아닌 걸로 갈라졌잖아요? 


큰아들이 견진성사를 받을 때였는데 보좌신부님이 저를 따로 부르더니, ‘아들이 견진을 받는데 엄마가 개신교 신자라면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아들한테 직접 물었더니 ‘저는 우리 집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에 긍지를 가져요. 엄마가 불교여도 엄마의 종교를 존중해요.’ 라고 답하지 않겠어요, 중학교 2학년 짜리가? (웃음)


작은아들이 사제서품을 받기 전해에 최창무 대주교님께서 저에게 가톨릭입교를 권하셨어요. ‘공인이 되는 사제의 엄마가 개신교 신자라면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셨는데 그 때 마음을 먹고 가톨릭입교 절차를 밟았어요.


전순란 여사는 개신교 신자였던 때나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자인 지금이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실 별 차이를 못 느낀다. 어렸을 적 살레시오 수사님, 신부님들이 집에 자주 놀러오는 바람에 그분들 어깨를 타고 놀던 작은아들이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하겠다고 했던 일이 매우 자연스러웠던 것만큼이나 이 가족의 신앙은 구교와 신교를 가르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교황청 대사관 외교 동반자, “그래서 쫓아갔지요 뭐”


▲ ⓒ 문미정


2005년 ‘대사 부인들의 이름 찾기’라는 제목으로 한국여성신학에 기고한 글을 보았습니다. 여사님께서도 한때 ‘주교황청 성염 대사 부인’으로만 소개되셨다고요. ‘말 없는 꽃’ ‘행동하지 않는 꽃’으로 비유하기도 했는데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최소한 여자들의 이름은 쓸 거예요. 어느 핸가 청와대에서 재외공관장 초대 만찬이 있는데 대사들만 이름이 명찰에 쓰여 있고 부인들은 ○대사 부인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여자들도 이름이 있는데 왜 대사 부인이라고만 하세요? 이름을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제가 노무현 대통령한테 직접 건의를 했어요. 그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모르겠어요.


바티칸에서 ‘외교 동반자’로서 전순란 여사는 다양한 역할을 했다. 로마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신학생들이나 수녀들에게 김치나 명절 빔을 만들어 나누던 일화는 그 시절 로마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기억에 남는 일화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전순란 여사 입에서 유난히 자주 나왔던 말은, “그래서, 쫓아갔죠 뭐”였다. 로마에 있는 동안 어려움을 겪는 수도자나 신학생들 이야기가 들려오면 여사는 그 길로 한 달음에 쫓아가곤 했다. 


어느 큰 수도원에서 제3세계 수녀들이라고 무시하며 한국음식을 못 먹게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 까다로운 원장수녀까지 모두 초대해 한국음식으로 한 상 거하게 차려주고는 ‘이렇게 가끔씩 김치를 담궈 보낼 테니 냄새가 나도 이해해 달라’고 허락을 받았다. 어느 수녀원에서는 우리나라 수녀님들이 하루 종일 빨래만 하는 등 고된 일만 시키고 한국성가책 반입도 안 된다고 하여 한국음식을 해서 선물로 가져다주고는 매달 한국어 잡지를 몇 가지 보내줄 테니 여기 한국수녀님들이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수도복을 벗고 초췌한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가는 수녀를 공항에서 꼬옥 안아주고 “이런 모진 일들을 겪었으니 앞으로 하느님께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줄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여사는 엄마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눈에 보였다. 지금에 와서 누군가 그 시절 나에게 도움을 받았다며 인사를 전해오기도 하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 시절 ‘외교동반자 전순란 여사’의 외교 전략은 그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그냥 쫓아갔을 뿐’이었다.  



지난 일기를 보면, 가톨릭교회 안에서 여성사제에 대한 인식이나 로마에서 보았던 숨 막히는 남자들만의 세계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한계를 느낀 적이 있으신지요? 또 동시에 가톨릭교회의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바티칸에 있을 때, 여신학자협의회 시절 친구인 정현경 미국 유니온대학교 신학대학교수가 베네딕토 16세 즉위식에 맞추어 로마에 왔어요. 정 교수는 외교관석인 내 옆에 앉아 즉위식 장엄미사 광경을 올려다보며 ‘저 많은 사람들 중에 빨간 원피스 입은 늙은 남자들 말고 다른 사람은 없네요. 어떻게 여자들이 단 한명도 없지요? 바티칸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네요.’ 라고 하더군요. 우리 눈에는 익숙하니까 당연하게만 보였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어색하게 보였던 겁니다.


전순란 여사는 성공회나 루터교 같은 곳에서 여성사제의 전례를 보면 참 느낌이 좋았다. 그러나 유난히 여성사제 문제에 보수적인 가톨릭을 보면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성에게 사제품을 허락하는 것은 앞으로 백년은 더 걸릴 일’이라고들 한다면서, “하지만 남성들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겁먹지 말고 계속 노력하면 좋겠다”고 했다. 여성 사제를 향한 일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면 어려움 끝에도 열매를 맺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절로 소멸할 일이니 ‘쫄지 말고 여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일, 생명의 신비를 함께 느끼며


일기 가운데 “우리 여성은 온 인류에게 어머니로 태어났다”는 구절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누군가의 딸이면서 아내이고 어머니이기도한 여성들, 그리고 소외된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 방면으로 여러 활동을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시대의 여성,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까요?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넉넉하면 좋겠어요, 모든 것을 너무 절박하게 생각하지 말고. 옆에 있는 사람과 서로 의지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에게는 남편이 그런 존재인데 꼭 남편이 아니더라도 손을 뻗어 함께 잡고 갈 수 있는 존재를 두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들한테도 ‘행복하게 살아라. 하느님은 너희가 행복하길 바란다. 행복이란 것이 너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타인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그 행복한 모습에서 너희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다.’라고 합니다. 하루 세끼를 먹을 수만 있으면 내게 행복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사에 ‘이것이 내 욕심이냐 아니냐?’를 두고 판단하면서 살아가야 할 거에요. 그 담엔 자기가 결정하고 선택한 것에 모든 것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고, 그렇게  후회 없이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어요.



함양군에서 개설한 귀농하거나 귀촌한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하는 ‘농업대학’의 친환경과에서 꼬박 3년을 공부하고 농사를 짓는 자칭 ‘학구파 농군’이라는 소개를 보았습니다. 계속 농사지으면서 살아갈 계획이신가요?


물론이요. 전 처음부터 농사가 재밌었어요. 처음에는 씨를 뿌릴 때 비가 오기 전에 해야 하는지 씨앗은 얼마나 깊이 심어야 하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죠. 그래서 함양농업대학에서 학력을 세탁했어요.(웃음) 


농사를 지으면 제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같이 동참하는 것 같아요. 여기 살며 제일 행복할 때가 해너미에 밭이랑에 걸터앉아 풀을 매다가 하늘을 볼 때면, 내가 그 분의 창조사업에 동업자로 일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손톱만한 씨감자 한 쪽을 심으면 흙속에 주먹만 한 감자들이 주렁주렁 열리다니 얼마나 경이로워요? 


▲ 우이동 집 문패 ⓒ 문미정


전순란 여사와 성염 교수는 지리산 휴천재를 본거지로 두고, 한 달이면 일주일 남짓을 서울 우이동 집에서 보낸다. <성염, 전순란, 빵기, 빵고네 집>이라고 적힌 문패가 골목을 지키고 있는 우이동 집은 어렵던 신혼, 남편이 번역 일을 생업을 삼던 시절에 모은 돈으로 운 좋게 장만한 집이다. ‘부동산이나 집은 재테크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성염 교수의 철학에 따라 고치고 가꾸며 지금까지 40년 넘게 함께 나이 드는 보금자리다. 


지리산 ‘휴천재’는 1층엔 공소회장인 토마스 씨 내외가 살고 전순란 여사 부부는 2층에 산다. 지금은 성염 교수의 이름으로 되어있지만 나중엔 좋은 사람들이 좋은 일 하는데 쓰라고 내주고 싶어서 아래층 식구들도 두 아들도 자신의 지분을 다 포기하기로 약속한 상태다. 그 곳 휴천재에는 오늘도 고추, 오이, 호박, 토마토, 양파, 감자가 여사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한 뼘씩 자라고 있다. 



내일은 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 18일 전순란 여사의 휴천재 일기 3650회를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사진제공=전순란)


“오늘로 3650꼭지(정확하게는 세 번의 윤년이 포함되어 3653꼭지)를 쓴 '지리산 휴천재 일기`는 매미의 껍질처럼 벗어서 내려놓고 싶다. 어느 나무에 기어올라 어떤 초가을 노래를 또 부를지 아직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흰 눈 속에 묻혀 모든 것이 자취 없는 계절의 이치를 안다.” - 2019년 8월 18일, 마지막 휴천재일기 중에서 



<휴천재일기>를 2009년 8월 18일에 시작해서 꼬박 10년을 쓰고 이제 마무리 하시는데 앞으로 또 어떤 계획이 있는가요?


보통 하루 일기를 쓰는데 두 시간 가까이 걸립니다. 어떤 때 손님들이 왔다 가면 자정이 넘어 쓰기 시작해서 새벽 두세 시까지도 펜을 잡고 있어요. 매일 쓰는 일기라 미룰 수가 없으니까요. 이제 그런 시간들 대신에 여유를 얻어 책을 읽고 싶어요. 읽고 싶은 책 실컷 읽고 아마도 머지않아 일기가 아닌 수필이나 콩트처럼 좀 다른 글을 써보고 싶기도 해요.


지난 시간 꾸준히 일기를 쓰다 보니 사물을 더 깊이, 넓게 보게 되었고 생각을 더 많이 하는 버릇이 생겼다. 무엇하나 허투루 보고 지나가는 일 없이 항상 의미를 찾게 됐고, 화나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도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다. 


‘내일은 어떤 꿈이 있을까, 내일은 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것이 바로 기다림이고 행복이라는 전순란 여사. 어느 땐 나쁜 일도 오지만 다시 생각하곤 한다. ‘이건 아마 더 좋은 꿈을 꾸려고 오늘은 나를 주저앉히셨을 거야.’ ‘무릎을 꺾으면 사람이 더 높이 뛸 수 있는 법’이라고 전순란 여사는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전순란 여사는 그동안 <휴천재일기>를 성원해준 <가톨릭프레스> 독자들에게 “별것도 아닌 소소한 생활 이야기에 관심 갖고 공감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들도 매일 매일 행복한 꿈과 만나기를 바랍니다.”라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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