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7일 화요일, 서울은 맑고 거제는 흐림
환한 빛살 속에 테라스에서 참새들이 부지런히 아침을 먹는다. 질척이는 비도 안 오고 목숨 걸고 나서야 할 고양이도 안 보인다. 염치없는 비둘기들이 뒤뚱거리며 한두 마리 보이지만 작은 참새들이 못 먹게 쫓아 보내지는 않는다. “어르신 먹게 비켜!”라거나 “아랫것들은 기다렸다 담에 먹어라!”거나 하지도 않는다. 서로 먹을 만큼 풍부한 먹이가 있어서다.
전 세계인이 제대로 나누어 먹으면 현재 지구상의 인류 73억이 충분히 먹고 남을 식량이 해마다 생산되고 있다는 통계다. 그렇지만 짐승들 사료로 쓰고, 남는 것은 곡물가 떨어지지 않게 태평양에다 쏟아붓는다는 양곡상들의 횡포... 바다를 오염시키면 시켰지 날마다 굶어죽는 10만명의 인류와 나누어먹지는 못 하겠다는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교황님이 “야금야금 세계대전(a piecemeal world war)은 이미 시작했다. 제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했다.”는 발언을 하셨다. 11.13 파리 테러 사흘 전에 북이탈리아에 있는 ‘제1차세계대전 이탈리아인 전몰자묘지’에서 행한 연설에서였다, 보스코가 읽은 이탈리아 어느 보수신문은 2017년 2월에 핵전쟁이 터지고 일주일만에 “전쟁은 끝났다, 승자패자 몰살하고서...”라는 글귀로 가상시나리오를 마치고 있었다.
요즘 미국의 횡포로 아랍세계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파리 테러, 한반도 주변에서 미국과 일본과 한국 극우집단, 특히 언론의 광분으로 미루어 안목있는 지성들에게 인류는 종말의 파국을 향해서 황급하게 달려가는 모양새로 비치나보다.
오늘 은행을 찾아가 안차장을 만나서 통장을 정리했다. ‘유엔난민기구’에 보내던 후원금을 우리 ‘환경연합’으로 돌리기도 했다. 지난 5년간 이명박 집단이 죽여 놓은 우리나라 물과 거기 연계된 흙을 살려는 일이 더 급해서다. 그런 노력에 결집된 단체가 환경연합이다. 국가는 국민을 위하고 이 강토에서 편히 살게 해 주는 게 본분인데, 극우의 손에 정권이 들어갈 적마다 정부는 엄청난 사고를 치고 국민이 뒤처리를 해야 하는 해괴망측한 세상이다.
점심을 먹고 2시에 서울집을 나섰다. 거제까지는 400여 킬로미터인데 7시 25분에 도착한다는 네비의 예상이 떴다. 보스코의 후배 김율리아노씨가 돌아가신지 1주기가 되는 날이다.
작년 10월 하순 금목서 두 그루를 아내 파올리나씨와 힘들여 캐서 묶어서 트럭에 싣고 휴천재를 찾아와 마당에 심어주었다. 그리고 두 나무가 뿌리를 내려 흙맛을 보기 시작할 무렵, 가을 낙엽 한 장에 업혀 홀연히 세상을 떠나버렸다. 우리 사야에서 사라져 지구라는 별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가버렸다.
사방치기를 하던 아이가 동무들을 금 이쪽에 두고서 술래가 되어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한 마디 하고서는 온데간데 없어진 셈이다. 꼭꼭 숨었던 친구들은 술래가 찾아오는 기색이 하도 없어 싱거워진 맘으로 여기저기서 모습을 나타나는데 정작 술래는 집에 가버리고 없다니...
갑작스레 남편을 여의고 지난 한 해 동안 겪었을 파올리나씨의 서러움과 외로움! 나로서는 짐작밖에 못하지만 남편을 여읜 삶은 정말 산목숨이 아니었을 게고 ‘미망인(未亡人: 못 죽어 사는 사람)’이라는 말뜻을 실감했을 게다. 덕유산을 지나며 로사리오를 바치면서 우리 주변에 혼자된 여인들을 꼽아 성모송 한번씩을 드리는데도 몇 단이 손가락 새로 술술 넘어간다.
7시 넘어 거제성당에 도착해서 우리를 극진히 아껴주시는 김용민 신부님을 만나 반가웠고, 기일의 위령미사를 함께 한 이 지역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들, 율리아노씨의 대자들, 본당 M.E. 동기들과 함께 집으로 와서 큰아들의 인도로 제사를 올리고, 연도를 드리고, 정성스러운 저녁식사를 대접받았다.
모든 손님이 간 뒤 두 아들과 아내와 한참이나 고인의 생전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정이 되었다. 머지않아 뒤따라갈 아내 파올리나, 그가 지상에 남기고 간 듬직한 두 아들과 두 며느리와 세 손주를 밤하늘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살피고 있을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