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저녁 7시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미사’에 참례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서울광장에서 대규모 시국미사를 거행하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2013년 9월 23일 저녁 ‘국정원 해체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전국시국기도회’를 거행한 이후 2년 만이었다.
충남 태안에서 살고 있는 나도 절절한 마음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 시국미사에 참례했다. 나는 민주주의를 거슬러 역주행이 시작된 이명박 정권 때부터 모든 시국미사에 적극적으로 참례해왔다. 위기의식과 암담하고 처절한 심정 때문이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 거행된 생명평화미사, 4대강 파괴사업 중단을 위한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의 지리산 노고단과 임진각 망배단을 잇는 2년 동안의 오체투지 순례기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2년 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에 거행되었던 4대강 파괴사업 중단을 위한 월요미사, 경기도 양평군 두물머리 등 전국 각지에서 거행된 생명평화미사, 1년 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 대한문 광장에서 거행되었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생명평화미사, 제18대 대선의 불법부정을 규탄하는 전국 각 교구와 수도회의 시국미사,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실종자들을 기억하는 대한문광장과 광화문광장 추모미사 등에 적극적으로 참례했다.
지난 2010년부터 숨 가쁘게 달려온 몇 년이었다. 그러다가 금년 6월부터는 매주 수요일 오후 광화문의 세월호 농성장으로의 발걸음을 잠시 멈춰야 했다. 건강문제 때문이었다. 5년 동안 내처 내달린 발걸음을 멈추니 너무도 안타깝고 죄스러운 심정이었다. 그런 연유로 더욱 절절해진 마음을 안고 지난 16일 저녁 서울광장 시국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씨임에도 실로 수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이 참례했다. 사제들은 100명이 넘었고, 신자들은 1,500명가량이었다. 사제들은 제의 위에 우의를 입었고, 신자들은 우의를 입거나 우산을 쓰고 선 채로 미사에 함께 했다. 촛불 대신 모두들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켜고 세상을 향해 흔들기도 했다.
노동개혁이라는 말로 치장되는 노동개악, 40년 전의 유물인 국정 역사교과서로 암시되는 유신 부활,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방해하는 갖가지 공작 등은 민중의 촛불뿐만 아니라 횃불을 부르는 일이다. 바야흐로 민중의 횃불이 필요한 시절임이 분명하다.
백성의 눈을 가리고 대침을 박는 푸닥거리들
미사를 주례하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김인국(청주교구 성모성심성당 주임) 신부의 강론을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강론 내용 중에 민주(民主)라는 말의 민-'백성 민(民)'자에 대한 연원 소개가 있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점 하나로 그림 속에 갇혀 있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해주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점 하나로 눈동자가 살아 있게 하고, 본래의 자기를 회복하게 해주었다니 놀랍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어디에다 그 점을 찍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면 화룡점정이 아니라 그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눈을 가려서 사람을 속이고 사람을 홀립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백성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다 안 되겠다 싶으면 아예 백성의 눈동자를 뽑아버리려고 대듭니다.
백성 민(民)이라는 글자에 그런 서글픈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민주주의라 할 때의 자랑스러운 민 자(字)가 고대에는 ‘눈이 먼 사람’을 가리키는 글자였다고 합니다. 커다란 눈에 바늘을 찔러놓은 형상을 그린 글자가 백성 민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티 하나만 들어가도 견디지 못하는 게 어린 백성인데, 죄 없는 그 눈에 긴 바늘을 찔러 놓았다면 이보다 극악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이런 게 독재자들의 못된 소질이고 버릇입니다. 독재자들의 잔인한 소행 못지않게 무서운 것은 그다음 벌어지는 결과입니다. 백성들이 자기 눈에 무엇이 박힌 줄도 모른 채 사물을 왜곡해서 바라보지만 의심은커녕 확신에 가득차서 독재자를 편듭니다. 그래서 속이는 일도 무섭고 속는 일도 무섭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와 같은 무서운 공작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국정 역사교과서는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려는 독재자의 대침(大針)입니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있었던 ‘민중총궐기대회’는 민의(民意)의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3만 명의 함성은 뜨겁고도 장대했다. 역사의 소용돌이임이 분명했다.
그 소용돌이가 잦아들면서 요란한 푸닥거리가 온 나라를 휩쓸었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일으킨 소용돌이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한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소용돌이를 호재로 삼는 푸닥거리는 지속적으로 온 나라를 뒤덮었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일부 종편들과 공영(또는 관영)방송들, 그리고 조중동 등 수구족벌언론들은 민중총궐기대회를 난도질해대는 푸닥거리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과격시위’라는 말은 약과였고, ‘폭도’라는 말도 예사로 동원되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보도와 흡사할 정도였다.
그들은 경찰과 충돌하는 과격시위 모습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보여주면서, 왜 그런 시위가 일어났는지, 왜 13만 명이 모였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위 보도를 하려면 서울 도심에 13만 명이 모이게 된 이유도 제시되어야 하건만, 그들은 그것을 철저히 외면했다. JTBC를 제외하고는 종편 어디에서도, 뿐만 아니라 공영방송들과 조중동 지면에서도 13만 명이 집회를 한 이유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고 김남주 시인은 일찍이 그런 보도들을 가리켜 ‘개 짖는 소리’라고 했다. 김남주 시인이 1980년대에 보고 듣고 느꼈던 개 짖는 소리들이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창궐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독일의 한 유력 언론은 한국의 언론들을 가리켜 ‘박근혜의 애완견’이라는 보도를 했는데, ‘애완견’이라는 명칭 때문에 개 짖는 소리들이 더욱 실감이 나는 기분이다.
사람이 기사를 쓰고 보도를 하는 게 아니라, 개들이 기사를 쓰고 보도를 하는 꼴이었다. 집회 이유는 전혀 알리지 않고 시위 장면만을 보여준다면, 그건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개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보도들은 한마디로 개 짖는 소리였다.
내 주변 사람들, 특히 내 또래들 중에는 종편 방송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한마디로 종편 방송의 충실한 신민(臣民)들이다. 종편들 중에서도 ‘TV조선’이 단연 으뜸이다. TV조선에서 들은 얘기들을 가지고 자기 얘기처럼 떠벌리는 사람들도 많다.
요즘엔 모임 자리에 가면 14일의 민중총궐기에 관한 얘기가 화제를 이루곤 한다. 종편들의 푸닥거리가 재연된다. 과격시위로 경찰 버스들이 파손되었다느니, 의경들이 다쳤다느니, 국민 혈세가 낭비된다느니, 경찰 버스로 차벽을 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느니…. 한 번은 푸닥거리를 재연하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과격시위라 치고, 왜 서울 도심에서 그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는지, 왜 서울 도심에 13만 명이 모였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 있으면 얘기 좀 해봐.”
아무도 없었다. 푸닥거리 방송에서 개 짖는 소리만 들었으니, 그것을 알 리 없다. 방송들이 시위 장면만 보여주고 집회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니, 종편의 신민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 한심하고 무서운 일은, 왜 서울 도심에 13만 명이 모였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3만 명이 시위를 한 사실은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의문을 갖지 않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왜 저 친구들에게는 의문부호가 없는 것일까?
어쩌면 종편들과 관영방송들의 푸닥거리, 개 짖는 소리는 충실한 신민들의 머리에서 의문부호마저 거세해 버리는 효과까지 발휘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라디오 하나로 독일 국민들을 쥐락펴락, 좌지우지했다. 문명의 이기인 라디오가 없었다면 괴벨스의 능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은 TV가 있어 특히 내 또래들은 연일 개 짖는 소리만 듣고 의문부호마저 박탈당하며 산다.
이런 현실을 놓고 보면, 푸닥거리 방송을 만들거나 이용하는 쪽에서는 전직 대통령 이명박이 더없이 고마울 것 같다. ‘미디어법’을 날치기로 강행 처리하여 종편시대를 열었으니, 그보다 더 큰 업적이 또 어디 있으랴.
그러나 푸닥거리가 아무리 요란스럽고 그 풍장소리가 동네방네로 마구 퍼져나간다 해도 한 시절일 뿐이다. 결코 영구적일 수는 없다. 푸닥거리는 푸닥거리일 뿐이다. 언젠가는 스스로 푸닥거리 값을 치르는 날이 올 것이다. 저 괴벨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