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4일 화요일, 흐림
오랜만에 잠을 푹 잤다, 깊이! 요며칠 잠이 모자라 눈이 뻑뻑했는데 간밤에 7시간 가까이 편한 잠을 잤다. 창밖에는 안주인이 온 기척을 눈치 채고 참새들이 단풍나무에서, 테라스 난간에서 재잘거린다. 묵은쌀을 넉넉히 뿌려주었다. “오늘 내려가면 언제 다시 올라올지 모르니 집 잘 보거라, 길냥이한테 잡혀먹히지 말고!”
아침기도와 티벳요가를 혼자서 했다. 이 간단하고 쉬운 요가는 한국염 목사가 보급하고 내게 가르쳐준 운동인데 본인은 두어 달 하다 말았고, 다른 사람들도 배운지 1년안에 다 그만두었다는데 수년간 계속하는 사람은 오로지 우리 부부뿐이란다. ‘한 사람 건졌다.’는 투다. 아침요기를 하고 옷보따리를 싸들고서 집을 나섰다.
시집 올 때 가져온 양단 몇 마름
옷장 속 깊이깊이 모셔 두고서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
펼쳐만 보고, 둘러만 보고 (정태춘 작사작곡, 박은옥의 노래)
내 겨울옷이 서울에 실려와 드라이클리닝을 마친 뒤 모조리 서울집에 걸려 있어서 자그마한 트렁크에 넣고서 끌고나왔다. 박은옥의 노랫말처럼은 아니지만,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행복한 가게’에 걸려야 할 만큼 많기도 하고 옷의 수준 역시 거기 내다걸고 나눠 입을만한 평범한 것들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나를 따라 늙어온 옷들이라서 차마 못 버리는데 보스코는 제발 좀 처분하라고 성화다.
"한국사람 정서로는 산 사람이 나눠준 옷은 그래도 입지만 죽은 사람이 남긴 옷은 절대 안 입는다."는 것이 보스코가 성화를 부리는 논거다. 보스코는 살레시오 노신부님의 부친이 남기신 바지들도 즐겨 입어왔고, 베니스 마씨밀리아노씨의 할아버지가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입었다는 모직코트도 얻어서 (줄여서) 여태까지 겨울마다 입는다. 나도 알프스 세레나가 두고 간 옷을 그니의 남편에게서 얻어 지금까지도 입는다. 그니가 입던 옷을 입을 적마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세레나의 미소가 생각나면서 그니를 퍽 가까이 느끼는데....
11시 30분 광화문 ‘가온’이라는 뷔페식당에서 ‘목우회’ 언니들을 만났다. 거의 7개월만의 상봉이었다. 시국관이 같고 걸어온 길이 비슷해서 언제 만나도 늘 가깝다. 일본에 가 있는 인재근 의원만 빼고 다 나왔고 “전여사 본다 해서 나왔다.”는 명준언니는 형부까지 모시고 나와 목우회를 떠난 분들의 자리를 채워준다.
한데레사 언니에게 “함세웅 신부님한테 내 연애사를 전했다며?” 따졌더니만 “함신부님이 당신의 연애와 모험을 사실과 달리 알고 계셔서 바로잡아 줬을 뿐이야.”란다. 송데레사 언니는 당신네 본당신부가 내 얘기가 나오자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내가 보스코의 '둘째부인'이라고 들었다기에 그걸 바로잡느라 애먹었다는 말도 들려준다. 내 참, 남의 얘긴 역시 찬이 없을 때 만만한 반찬이겠지만, 아무리 나이 차 있어 보인다고 이 전순란이 '성염 대사의 둘째부인'으로까지 소문나다니...
6시에 수동에 도착해서 차를 갖고 집에 오니 보스코가 내 도착시간을 미리 알고 있었다. 난 5시 30분차로 내려간다고 전화해 두고 2시 30분차를 탔는데.... 내가 차표를 끊거나 물건을 살 때마다 카드결재가 그의 핸드폰에 뜨니까 다 미루어 짐작하겠다. 그의 카드결재도 일일이 내 핸드폰에 동시적으로 뜨니까 우린 서로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다.
빵기가 멀리 네팔에 출장 가 있어도 며늘아기가 자주 연락을 해 온다. 카톡에 올라오는 손주들 사진이 제일 반갑다. 연말에는 사부인이 가셔서 딸이랑 외손주들이랑 함께 지내신다니 마음이 든든하다. 자식들을 나누어 갖는다는 게 사부인들 사이를 이심전심으로 동기간처럼 살갑게 만든다.
집에 와 보니 "어? 나 없는 새에 누가 휴천재 안주인을 하고 갔담?” 보스코가 혼자서 밥 차려 먹는다는 것을 알고 ‘귀요미’ 미루가 이사야랑 찾아와서 연잎 밥에 조기구이에 간장새우장에 정성껏 밥상을 차려서 보스코에게 점심대접을 하고 갔다! 뒤늦게 얻은 우정이지만 우리 지리산 생활을 정말 푸짐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미루네 부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