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죽음과 부활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고통과 죽음을 부활로 이르는 단순한 통과의례 정도로 여기고 있다. 예수의 고통과 죽음이 약혼 정도라면, 예수 부활은 결혼식인 셈이다. 예수 죽음의 원인과 효과를 혼동하는 그리스도교 내부의 관행은 예수 죽음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예수 죽음이 죄 사함을 가져왔다는 설명은 누가 예수를 죽였고 왜 죽였는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가로막고 있다. 죄 사함의 감격이 아무리 크다 해도 누가 왜 예수를 죽였는지 반드시 묻고 정확히 알아야 한다.
예수 부활의 기쁨이 아무리 크고 기뻐도 예수 죽음의 충격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수 부활의 기쁨이 크고 기쁜 그만큼 예수 죽음의 충격은 더 커진다. 예수 죽음의 충격이 예수 부활의 기쁨을 막지 않듯이, 예수 부활의 기쁨이 예수 죽음의 충격을 막지 않는다. 예수 죽음의 충격을 고뇌하는 그만큼 예수 부활의 기쁨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부활이라는 해답으로 다급하게 도망치기 전에 십자가라는 충격 자체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풍경은 그렇지 않다. 예수 부활의 기쁨을 미리 지겹게 교육받은 나머지, 예수 죽음의 충격을 미처 살펴볼 틈도 허락되지 않고 있다. 예수 죽음의 충격을 외면한 채 예수 부활의 기쁨을 먼저 가로채는 외눈박이 신앙인이 적지 않다. 목회자나 신학자도 이 모습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하느님
예수 부활보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하느님을 먼저 다루어야 한다. 논리적 순서가 그렇다. 예수 죽음에서 하느님은 어떻게 처신하였는가 묻는 일이다. 하느님은 예수 죽음이라는 역사의 법정에서 방청객도 아니요 증인도 아니요 피고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처럼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하느님이 되어 버렸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분풀이는 달성되었으나, 하느님 없는 인류는 외로운 절망적 신세가 되었다. 몰트만은 하느님의 궁색한 처지를 신학적으로 구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죽은 하느님을 인간이 이제 부활시켜야 할 판국이 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몰트만이 선도한 이 흐름은 예수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해설에서 하느님을 개입시켰다. 하느님이 예수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이 설명은 하느님에게 일종의 알리바이를 선물한 셈이 되었다. 하느님은 우주 밖에서 인간의 고통을 관찰하는 무심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가 죽임당한 이유가 있다면, 왜 역사에서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죄 없이 희생당하는 사람이 늘 생기는가. 예수가 죽임당한 일을 하느님 사랑이 최대로 표현된 일이라면, 하느님은 왜 당신 사랑을 다른 형태로 드러내지 않는가. 왜 죄악은 계속 힘이 있는가.
인간에게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질문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신학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학에는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 분명히 있다. 하느님이 무능할 뿐 아니라 신학도 무능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가난한 백성들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하느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가난한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하느님을 보듯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하느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가난한 백성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몰트만의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예수는 부활했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하느님은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다. 여기서 신학은 이론적으로 말문이 막힌다. 세월호 참사처럼 이유 없이 희생되는 사람의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통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고통을 없애려고 고통에 맞서 투쟁할 때만 고통이 의미 있다”고 여성신학자 도로테아 죌레는 말한다.
나의 스승 소브리노는 “해방자 예수”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신앙에서도 고통은 계속 수수께끼다. 고통 앞에서 종교인과 그리스도인은 상징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인 예수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 앞에 서게 된다.”
질문은 늘어나고 답은 변변찮은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가 할 일은 지금 무엇일까. 예수처럼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는 일이다. 역사의 희생자 편에 서서 같이 고통 받는 일이다. 그런 행동이 뚜렷한 답이나 해결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밖에 다른 방법은 그리스도교에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도 하느님도 십자가에 목 박히는데, 왜 그리스도교는 신학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을 두려워할까.
세월호와 그리스도교
지금 그리스도교에게 무신론보다 우상 숭배가 더 심각한 문제다. 돈과 권력을 숭배하는 그리스도교 내부의 태도가 그리스도교 외부의 무신론보다 그리스도교에 더 위험하고 심각하다. 지금 그리스도교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오고 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있는 주범은 돈과 권력을 숭배하는 성직자 목회자들과 그 추종 세력이다.
거짓 힐링은 사람을 킬링시킨다. 참 희망은 저항에서 온다. 저항 없이 희망 없다. 저항 없이 부활 없다. 그리스도교가 불의한 세력에 목숨 걸고 저항할 때, 부활은 말없이 다가온다.
지금 신앙인과 신학자는 교회와 도서관에서 있을 때가 아니다. 자료를 모으고 해석할 때가 아니다. 신비를 말하지 않고 현실을 본 예수를 따라야 한다. 교회 밖으로 나가, 거리로 나가 세월호 유가족들과 같이 삼보일배하고 같이 아파해야 한다. 저항해서 고통 받는 길을 예수가 보여주었다. 그 길 말고 대체 어떤 길을 그리스도교는 바라는가.
가난한 사람들 밖에서 구원은 없다(Extra pauperes nulla salus.) 교회 안에 교회가 없고, 교회 밖에 교회가 있는 우리 시대다. 하느님을 설교하는 그 자리에 하느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바울이나 초대교회는 ‘말씀’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지만,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는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예수를 말할 것이 아니라 예수 사건으로, 예수가 있는 현장으로 우리가 가야 한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토론하기 전에 세월호 유족들이 있는 곳에 먼저 가야 한다. 해석보다 행동이 먼저다.
믿음이 행동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행동하는 그만큼 믿음은 인정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 예수가 있고 하느님이 있다. 그곳에 진짜 교회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다. 세월호 유족들이 있는 그곳이 오늘 교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