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5일 화요일, 맑음
우리 한신 동문들에게는 휼륭한 선배와 동창들만 있는 게 아니다. 어제 여동문회에 왔던 후배 한 사람은 대학원을 졸업하면서부터 여태까지, 성매매 금지법이 생기기 전에도 지금도 십대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며 전쟁터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참담한 처지를 목격하면서, 포주와 그 양아치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그렇게나 보살피고 싶던 소녀들의 자살한 시신을 배웅하면서(가족이 아예 없거나 찾아오질 않으니 그니 혼자서 상주 노릇까지 하며) 굽히지 않고 일해 왔다.
한국여성들의 밑바닥 인생을 너무 오래 보다 못해, 자기의 삶마저 너무도 피폐해져 감을 못 견뎌, 한 때는 (요즘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이 나라를 떠나 방랑생활도 했단다. 그렇게 자기 건강과 심경은 좀 회복했지만 늘 위기에 내몰리는 청소녀들의 아픔을 더 이상 외면 못해 다시 그 일터로 돌아왔단다. 지금은 그래도 성매매금지법이 나왔고 여성가족부의 지원도 없지 않아 그래도 소명의식을 지닌 4명의 스텝과 더불어 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그 후배가 하고 있는 활동들의 목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이버 또래상담’, ‘서울위기청소년교육센터’, ‘청소년성매매피해상담소’, ‘법률 의료 심리자활지원단’, ‘전문자문재능지원단,’ ‘청소년매매관련 이슈의 생산 및 연대활동’, ‘국제아동성착취근절을 위한 국제연대’, 연구 홍보 출판, 관련단체 MOU 체결... 이 기다란 목록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병든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훤하게 알 수 있다.
엘리사벳씨가 아침 일직 오늘의 우리집 손님맞이를 도우러 인천에서 우이동까지 와 주었다. 집안일도 정신없이 바쁠 텐데, 서울 경기 일대 억울하고 암담한 사람들의 거의 모든 집회를 찾아다니면서 그 아픔을 나누는 일만으로도 엄청 분주할 텐데, 인천교구 정평위원으로 활동하는데도 벅찰 텐데 내 부엌일을 도우러 먼 길을 와 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더구나 함세웅 신부님은 여성 존중이 몸에 밴 분이라 주부가 반드시 밥상에 함께 앉기를 원하는 분이어서, 또 그게 예의이기도 해서, 엘리사벳씨의 도움으로 나도 모처럼 안충석 신부님, 김택암 신부님, 양홍 신부님이랑 함께 앉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엘리사벳씨의 날렵하고 재치 있는 손놀림으로 모든 요리가 차례를 맞추어 예쁘게 나왔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40년전에 창립하고 선배들로서 지금까지도 앞장서시는 분들이기에 이렇게 연말에라도 한번 모셔 이 나라 민주화와 인권신장의 최전선을 이루는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어서 마련된 자리다.
네 분은 점심을 들면서 서로 동기동창 벗으로 웃고 놀리고 하는 품이 어린아이들과 다를 바 없어, 서슬 퍼런 독재와 마주 싸우며 체포와 투옥, 시위와 최루탄속을 맨 앞장서는 분들에게 저런 천진하고 해맑은 모습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놀랍다. 하기야 군부독재 50년간 운동권 사람들을 체포하고 조사하고 고문하던 자들이 한결같이 털어놓는 후일담(보스코를 남산에 잡아가 조사하던 사람이 가택수색을 와서 내 남편을 두고 슬쩍 흘리던 말)에 의하면, 운동가들은 “하나 같이 너무 순진하고 너무 선량하고 그러면서도 너무도 올곧은 사람들”이었다니....
밤늦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우이동 경전철 차고지사건을 원만히 해결해 놓고서 오늘은 성년식을 했다는 얘기다. ‘삼각산21’의 공동대표이기도 한 보스코도 나도 손님대접을 핑계로 못 간 것이다.
그 친구는 어떤 악연으로 나와 처음 만났으나 NGO 활동에 눈뜨고서 정말 물불 안 가리고 일하는 여자다. 예수님이 왜 사울 같은 괄괄한 박해자를 냅다 걷어차서는 바울로 같은 사도로 만드셨는지 알 만하다. 공무원도, 자문위원들도, 구와 시의 의원들도 그니가 직격탄을 날리면서 꾸짖고 전문지식과 법문조항을 대면서 따지므로 다 그니를 두려워한다. 전순란도 그니를 그렇게 포섭하여 그렇게 훈련시켜 놓고 지리산으로 훌쩍 떠나서는 그렇게 모르쇠한다고 그니한테서 번번히 지탄을 받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