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차다. 하늘이 슬픈 지 눈 대신 비가 오는 12월 겨울이다. 이제 3일 밤만 지나면 성탄대축일이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가족들, 자기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계획을 세울 것이다.
도심에서는 화려한 조명들로 장식된 거리가 걷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성탄대축일 전날 오후와 성탄대축일 오후는 사람들로 꽉 찰 것이다.
성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성탄대축일 미사를 드릴 것이다. 성탄 9일기도 미사를 드리면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들을 하고서 말이다.
그러나 성탄대축일의 화려함과 즐거움 뒤에는 많은 아픔과 고통들이 있다. 기쁘게 보낼 수도 없고 즐거움 자체가 사치라고 느껴질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성탄대축일에도 너무 바빠 연인들이나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없는 청년노동자들과 아르바이터들, 거리에서 그저 돌아다니며 가게 쇼윈도를 보며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들과 노숙인들, 밖에 나갈 엄두도 못내고 집에서 텔레비젼이나 값싸게 구입한 스마트폰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가난한 가정들, 집보다 아동복지기관과 종교시설이나 거리에서 노는 가난한 어린이들이 그들이다.
얼마전에 인천교구 답동성당에서 내쫓긴 성모병원 노동자들도 있다. 자비를 잃은 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 내쫓긴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아버지를 물대포로 쏘아 중태에 빠뜨린 물대포 전경과 강신명 경찰청장의 사과를 기다리는 백남기 임마누엘 농민 가족들, 죽음의 진실을 2년 가까이 밝히려 노력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 좌절을 겪고 있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도 있다. 언제 한전이 송전탑을 세울까 걱정하는 청도 삼평리와 밀양 농민들이 있다. 일터의 횡포에 고통 받는 아르바이트 청년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다.
물론 정의구현사제단과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카리타스나 교구 사회복지위원회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여전히 교회차원에서는 벅차다.(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경우 청도 삼평리 송전탑 농성장에서 매년 성탄대축일에 목회자정의평화위원회와 함께 마을 주민들과 성탄예배를 드린다. 사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도시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예수와 가깝게 만나고 있다. 꼭 세례를 받아야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삼평리 마을주민들이 가르쳐주고 있다.)
지난번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여전히 자비가 자선사업에 그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의 원인은 보지 않은 채 성탄대축일을 보내려 하고 있다.
12월과 새해 몇 주 동안 도심의 전등 장식은 멋지다. 그러나 그 전등에 감전되고 고통당하는 나무는 외면하게 된다.
이쯤해서 주교라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왜 자비의 문을 열었는가.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내쫓아 버리면서 성탄대축일을 보내려 하는가. 교회의 주인노릇을 하는 평신도들, 돈만 주면 자비인가. 선심 쓰듯 물품을 전달해 주는 것이 자비인가. 성당에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지도 않으면서 돈 없다, 더럽다,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이유로 이웃들을 내쫓고 성탄을 맞이 하려는가. 묵을 곳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 안의 예수를 밖으로 내쫓는 성직자들은 어떻게 부자 평신도 손에 아기 예수를 내맡길 수 있는 것인가. 교회의 진정한 주인인 가난한 사람을 내쫓는 한국교회는 자비의 문을 닫아라.
이 시간 나 자신도 반성해 본다. 대구 시내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들을 그냥 지나쳐 버렸음을 반성한다. 나도 위의 위선자들과 다를 바 없었음을 반성한다. 성탄대축일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내쫓고 외면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 교회의 전례 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없다. 내쫓기고 외면당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연대하는 곳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는 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진실과 책임을 위해 기도하는 성탄대축일이 되길 바라본다.
눈물 겹지만 첫눈이다
눈물 겹지만 축복이다
-노동자 시인 신경현 시인의 시에 노래를 붙인
민중가수 임정득의 '눈물 겹지만 첫눈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