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3일 수요일, 비
올해 곶감을 안한 사람들은 용케도 근심걱정의 언덕을 잘 돌아서 간 사람들이다. 누구 말대로 우리나라 겨울은 삼한사온(三寒四溫)에서 올해 같이 ‘삼우사운(三雨四雲)’, 사흘 비 오고 나흘 구름 끼는기후대, 말하자면 한 주간 내내 해를 못 보는 계절로 바뀐 참이어서 오늘도 아침부터 짙은 구름이 지리산을 덮고 가랑비를 뿌리고 있다. 기후가 변하면서 우리가 살아오던 익숙한 세상도 지구에서 사라지는 기분이다.
아침 일찍 ‘카톡!’ 소리가 울려 누군가 사진을 보내오나 해서 열어보니 빵기가 보내온, 큰손주 시아의 첫영성체 사진이다. 유럽에서는 아이의 첫영성체가 큰 축제인데 할미가 너무 멀리 있어 축하도 제대로 못해주고 선물도 못 보내 마음이 안 좋다. 하지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제네바에 와 계시니 든든한 선물을 받았겠지. 더구나 내일은 걔의 여덟 살 생일인데....
가톨릭신자에게 ‘첫영성체’는 때묻지 않은 어린 신앙인에게 주님이 찾아오시는 의미 깊은 축제여서 친척과 지인들이 다 함께 모여 축하하는 자리다. 큰아들 빵기는 보스코의 유학시절 산칼리스토 카타콤바 ‘교황들의 경당’에서 윤선규 신부님(지금 벨기 겐트의 주교님)의 주례로, 로마에 유학하던 몇 분 신부님들의 공동집전으로 이루어졌다. 이요한 선생 가족과 카르멜라네 가족이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2006년 로마한인성당에서 김종수 신부님이 집전하신 시아의 세례
작은아들 빵고는 서울 신월동 수도원에서 홍부희 신부님의 주례로 소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강서방네와 빵고의 대부와 살레시오를 함께 보낸 지인들이 참석한 기억이 난다. 그때 보스코의 은사이신 기신부님이 함께 축하해 주셨는데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보스코의 손주 임마누엘을 내려다보시면서 “아하, 보스코 손주가 첫영성체했군!”하실 테고 보스코의 작은아들이 살레시안 사제가 되어 로마엣 공부하는 모습도 흐뭇해 하시겠지.
스위스 니옹성당에서 받은 시아의 첫영성체 사진
오전에 서울에 올라가 엄엘리사벳씨가 초대한 자리에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어제 도착한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OK 교정이 24일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출판사의 급박한 재촉이 있어 만사가 보류되고 말았다. 연말까지 인쇄를 마쳐 발행할 생각인가 보다. 저 책이 발간되면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3부작(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이 보스코 한 사람의 손으로 번역 주해되어 한국에서 출판되는 셈이다.
어제부터 그 일에 온통 몰두하면서 내일 올라가자는 보스코의 말에, 내일 오전 내내 운전을 하고, 저녁에 다시 살레시오까지 다녀와야 하는 아내의 고생, 더구나 다리 하나가 성치 못해 침을 맞아가며 운전하는 아내에게 하는 ‘남편의 갑질’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내 푸념에 그가 양보를 해서 점심을 먹고서 휴천재를 출발을 하니 2시가 훌쩍 넘었다.
책상에 앉는 작업과 강연 말고는 지금도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아내에게 떠넘기고 서울을 오가거나 강연지를 오가는 운전마저 시키는 ‘남편의 갑질’이라니! 그래서 "한국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구원받기에 충분하다!"는 정성헌 선생의 탄식이 나왔나보다. (요즘 세대에도 해당하나?)
일찌감치 홀몸이 되신 탓으로 큰아들을 잘 키워내야 고만고만한 동생들이 건사된다는 신념에서 오로지 큰아들에게 정성을 쏟우신 시어머님! 예컨대 초등학교 다니는 보스코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형이 세수하고 발 씻게 동생(준이서방님)더러 툼벙에서 세수대야로 물을 길어다 바치게 만드신 시어머님한테서 몸에 익힌 ‘갑질’이 아내에게 고스란히 돌오는 듯하다. 나한테는 사진틀 속에서만 계시지만 ‘아들의 갑질’을 통해서 며느리에게 넉넉하리만치 시집살이를 치르게 만드시는 중일까?
7시가 넘어 집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어느새 책상머리에서 꼼짝 않는 그를 저녁기도에 불러 앉히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도 “오, 엠마누엘이여...”라는 성모의 노래 후렴이 너무도 아름다워 “여보, 그레고리안 성가로 한번 불러줄래?”했더니만 오래된 그레고리안 성가책을 서가에서 꺼내서 경건하고도 아름답게 노래를 부른다.
먼 옛날 원선오 신부님의 오르간 반주로 주일마다 축일마다 라틴어 기도문을 그레고리안으로 불렀을 그의 젊은 시절이 표정으로 묻어나는 일흔다섯 나이의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