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논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소수 권력자를 만족시키는 현 체제는 문제제기를 당연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언의 길은 슬프고도 기나긴 고난의 연속이다. 예수의 슬픈 삶이 그러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죽어서까지 3번이나 파문을 당했다.
M. 에크하르트도 살아있는 내내 그토록 비난을 받았고, 신비영성가 힐데가르트 수녀도 700년이나 유폐됐다가 복권되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인종차별에 반대한 시위에 나섰을 때 흑인 목사들조차 그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같은 시대의 사람들로부터의 응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 세대를 향해 말하고 있었고 미래 세대의 지지를 받고 앞으로 나아갔다.
교회 안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다. 그렇다고 거짓 예언자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거짓 예언자는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들 안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백성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 언론, 거짓을 꾸미고 가르치는 지식인들은 거짓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 내의 거짓예언자들은 누구인가? 세상이 ‘힐링 캠프’니 ‘힐링 무엇’이라는 말을 붙여 팔아먹기 시작하자 덩달아 교회출판계는 ‘힐링’은 우리의 것이라며 갖가지 힐링을 쏟아낸다.
모두가 성공하리라는 무지갯빛 낙관론에 모두가 이제 싫증을 내고 있다. 십자가 없는 성공과 힐링이 난무하는 교회 학문과 대중강의 안에서는 올바른 지성과 영성의 풍토가 자리 잡을 수 없다. 그러니 교회 안의 반지성적인 풍토, 영적 지반이 영 허술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어디로나 가야한다. 복음의 빛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주저한다. 교회는 어느 새 대형화, 중산층화, 여성화, 고령화, 제도화, 관료화 되어 버렸다.
교회 안의 양들도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멀찍이서 바라보며 공동체에 들어와 보려는 이들에게도 배려나 관용이 없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교무금과 건축금을 꼬박꼬박 내며, 일 년에 두 번 정도의 판공에 나가서 내적 성찰이 결여된 고백을 위한 죄를 만들어 고해하고 신자로서의 의무, 율법을 지켰노라! 에 만족하며, ‘다 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위 ‘발바닥 신자, 손바닥 신자’가 대부분이며 강론 중에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면 무슨 큰 금기를 깬 것처럼 말하는 신자들도 많이 있다.
사회 민주화를 외치던 많은 지식인들과 엘리트들이 교회에 입문하면서 80년대 이래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의 교회는 중산층화 되어가고 대형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교회는 어떤 계층 어떤 계급을 향해서나 늘 열려 있는 공간이지만, 실상 이런 교회의 중산층화는 아직도 교회의 다수를 형성하는 도시빈민이나 서민층 신자들과의 위화감을 조성한다.
대도시에 수백 억 원을 들여 건축한 교회들이나, 교회에서 힘을 쓰려면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편견은 교회의 중산층화 혹은 부유화를 직·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구(解放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나 여가 공간, 친목공간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교회의 여성화와 고령화도 큰 문제로 지적된다. 본당의 미사 대중을 가만히 지켜보면 어느 본당이든지 -특별히 신도시 본당이 아니라면- 나이 많은 노인들과 여성들이 상당수임을 살펴볼 수 있다. 레지오마리애나 연령회 등 교회의 주요한 단체들의 활동력은 실상 이런 신심 많은 할머니들이나 중년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상당수의 남성 교우들은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면죄부(?)를 쓰고 교회 내 단체의 가입 및 활동을 꺼려하고 피하려고 한다. 동시에 이런 활동의 여성 중심적 운영에 비해 교회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는 여성선출을 꺼려하여, 여성들의 목소리가 교회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최근에는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천주교 신자모임 소위 ‘대수천’이라는 수상한 모임이 전국의 많은 양심적이고 건강한 지성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아니 건강한 많은 신자들이 그 옛날 예수가 길에서 당한 수모를 똑같이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자기들의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이들에게 제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제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야 50,5-6).
성당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십자가의 불빛은 대낮처럼 밝아있지만 신자들은 자꾸 교회를 떠나간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더 이상 교회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 학교 공부도 그렇지만 교리엔 영 흥미가 없다.
지난 해 2014년 주일학교 학생 수는 초등부가 9만 7,946명으로 10만 명 미만으로 줄어들었고, 중등부는 3만 6,190명, 고등부는 2만 2,139명이다. 2012년과 비교해서 초등부는 3.8%(3,846명), 중등부는 3.6%(1,348명), 고등부는 3.4%(772명) 감소했다. 지난 10년 동안 주일학교에 참여하는 학생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교회는 위기다. 위태롭기도 하지만 기회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이제 문제를 올바로 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기를 바랄 뿐이다. 사제에 대한 맹종과 헌신을 신앙으로 잘못 생각하는 신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공동체, 교회라면 변화는 아직도 먼 것이고, 그렇다면 끊임없는 계몽을 통하여 형식이나 제도보다 신앙의 내용을 근본적으로 강화시켜 나가는 데에 문제 해결의 출구가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교회는 다시 출발해야 한다.
오늘의 위기로부터
또 하나의 교회가 솟아나리라
많은 것을 잃고 보잘것없이 작아져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교회
번영의 시대에 지었던 건축물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교회
신자 수는 많이 줄어들고 사회적으로 누리던 특권도 내려놓아야 하는 교회
하지만 경험의 중심에 다시 신앙을 놓는 소수의 운동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교회
몹시 영적인 교회가 솟아나리라!
좌파와 우파사이에서 바람둥이 노릇이나 하며
자기의 정치적 중요성을 은근히 뽐냈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한결 영적인 교회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교회가 나타나리라
마침내 세상은 보리라!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믿음의 작은 무리를!
세상은 얻으리라!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해답을!
자신들에게 희망이 된 작은 양떼를…
이 글을 쓴 분은 다름 아닌 교황 베네딕토 16세 요셉라칭거!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전통은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지닌다.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 가능하게 한 것은 전통의 힘이었다. 이들은 ‘창조적 소수’일 뿐이다. 물론 역사는 이러한 창조적 소수에 의해 움직여왔고 변화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