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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3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1-23 02:14:55
  • 수정 2016-01-29 19: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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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느헤 8,2-4ㄱ. 5-6. 8-10)

<백성은 읽어 준 율법을 알아들었다>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시편(18)

주님,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나이다


제2독서(1코린 12,12-30)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지체입니다>


형제 여러분,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복음(루카 1,1-4; 4,14-21)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연중 제3주일 ~ 독서·복음해설 ~


제1독서(느헤 8,2-4ㄱ 5-6. 8-10) 해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거룩한 날이니 너희는 슬퍼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받아 힘과 용기를 내어라>


기원 전 538년 키루스 황제가 바빌로니아에서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칙령을 발표함에 따라 귀양살이하던 유다인들도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면서 조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느헤미야와 에즈라 두 인물이 열성적으로 적극 나서서 히브리인들에게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을 일깨우고 그들을 다시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에즈라는 법전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재조직할 임무를 떠맡았다.


오늘 독서에서 묘사된 예식은 에즈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아들여서 예로부터 이스라엘의 생활 기초가 되어 왔던 하느님과 맺은 계약들을 다시금 일깨우려고 기울인 노력을 나타내고 있다. 즐거운 축제인 초막절 동안 법전을 공적으로 낭독한 의미가 거기에 있었다.


이처럼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후 맨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축제를 벌이는 백성으로서 새로이 모여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친교의 예식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전례 모임의 전통적인 구조를 엿볼 수 있다. 그 전례와 예식에서는 과거에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한다. 전례를 거행하는 동안 에즈라는 법전을 자세하게 풀이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알아듣고 깨칠 수 있게 해 준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깨달은 온 백성은 마냥 기뻐하며 돌아가서 크게 잔치를 벌이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그 몫을 챙겨 주면서 먹고 마시며 즐겼다. 온 인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듣고 실천하여 당신이 주신 모든 것과 능력을 모조리 한 밥상 위에 올려놓고 나눔의 큰 잔치를 벌이고 친교의 기쁨을 누리라는 초대를 받고 있다.


시편(18) 해설

<주님,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나이다>


참된 말씀, 기쁨을 주는 말씀, 빛나는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해방을 체험하게 해 준다. 그런 깨달음과 생기와 기쁨이 하느님께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시던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법전을 낭독하고 새로이 풀이해 주자, 그런 깨달음과 생기와 기쁨과 감격에 넘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을 얽어매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생기에 넘치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현실의 진정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벗겨 주기 때문이다. 주님의 판단만이 참되고 옳으며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만이 올바른 인생길이다.


제2독서(1코린 12,12-30) 해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요 서로 그 지체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영적 특은의 다양성 및 그에 따라 공동체 안에서 맡은 임무와 구실의 다양성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단일성을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그 공동체에 풍요로움을 더해 준다.


사람의 몸이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오직 한 분뿐이시다. 몸에 지체가 여럿이고 다양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체도 여럿이고 다양하다(12절).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신 우리 모두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13-14절).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우리 모두는 세상과 역사 한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처럼 살아 그리스도의 삶을 이어가야 하는 무거운 사명을 띠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우리 모두는 먼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한 다음,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사람의 몸에 비긴 설명은 14-16절에도 나온다.


사람 몸의 지체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선물과 특은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의 공동선을 위하여 베풀어졌다. 모든 사람이 서로 몸 바쳐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베풀어졌다. 그리스도의 각 지체가 맡은 임무는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따로 없고 모두 똑같이 중요하다.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임무가 따로 없으며 모든 지체와 세포가 다 건강해야 하고 활력에 넘쳐야 한다.


복음(루카 1,1-4; 4,14-21) 해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채워졌다>


오늘 복음에는 루카 복음서의 두 대목이 연결되어 있다. 서론(1,1-4)과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이야기(4,14-21)가 연결되어 있다.


서론 부분은 일정한 양식에 따른 문장 구조와 격식을 갖춘 말투로 보아 그리스 문학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첫 번째로 방문하신 이야기 가운데서 당신을 메시아로 제시하는 첫째 부분만을 낭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당신을 배척한다는 이야기를 뒤로 미룬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 이사 6,1-2를 낭독하고, 그 예언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설명하신다.


루카 복음서 저자가 이사야서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구절만을 취하면서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구절은 빼놓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대신 루카 복음서 저자는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낸다.”는 이사 58,6을 덧붙이고 있다. 루카 복음서 저자가 강조하려는 점은 바로 예수님의 현존이 가져다주는 ‘은총’과 ‘구원’의 성격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다. 오늘의 인류 역사 안에서도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과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고 풀어 주는 구세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우리 역사의 현실을 고발하면서 끊임없는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 주는 말씀을 계속 들려주고 계신다.


묵상


가장 높으신 하느님의 말씀


백성에게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 전례의 본질 내용이다. 에즈라는 하느님의 법전을 선포함으로써 히브리인들의 공동체를 새롭게 조직한다. 예수님께서도 성경을 풀이해 주심으로써 당신 공적 생활을 시작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몸을 취하여 사람이 되고, 오늘날에는 신앙공동체에 베풀어 주시는 갖가지 특은을 통하여 전달된다.


성경은 창조사업을 하느님 말씀의 사업으로 제시한다(참조. 창세 1-2). 이스라엘 백성이 존재하게 된 것도 하느님의 말씀 덕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역사가 가장 비극적인 순간과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구원을 발견한다. 정치적 또는 사회적 여러 실패와 좌절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저버린 데 대한 벌로 여겼다.


에즈라도 나라를 재건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치적 내지 윤리적으로 새로운 깨우침을 주기 위하여 역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따르는 공동체를 조직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말씀을 다시 주의 깊게 들음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자기네 의무를 다시 발견하게 되며 충실하지 못한 자기 과거를 반성하여 뉘우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경외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께 다가갈 때,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그런 감격을 느낄 수 있다. 회개한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커다란 기쁨을 주고, 축제를 지내게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체험으로 깨달으면 축제를 벌이지 않을 수 없다. 그 깨달음으로 온갖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성경의 하느님께서는 불경한 자들이 섬기는 우상들과 달리 말 못하는 신이 아니시다. 성경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씀을 건네는 살아계신 분이다. 또한 기쁨과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과 같은 감정을 지닌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동서고금의 숱한 예언자와 현자를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계시해 주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 사는 당신 고향 사람들에게 성경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기쁜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신다. 메시아에 관한 약속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성령으로 축성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 갇힌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가 마침내 인류 역사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 구원이 그저 희망사항에 그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리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는 해방작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과 삶으로 직접 보여 주신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과 해방을 체험할 수 없다. 즉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신 ‘나누는 정의’와 ‘용서하는 형제애’의 기쁜 소식을 배척하는 사람은 구원과 친교의 기쁨과 진정 사람다운 따뜻함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사랑을 나누는 친교의 공동체로 자란다.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서로 한 몸을 이룬다. 그런 사람들은 서로 깊은 정을 나누고 서로 돕고 채워 주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해간다.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서로 섬기며 몸 바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가 되어야 하는 온 인류의 해방과 일치를 위하여 그리스도처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웃들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된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자신이야말로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주고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정신을 불어넣어 준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마누라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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