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7일 수요일, 맑음
하늘을 향해, 입천장을 향해 뻗어 오른 보스코의 윗니가 빛을 보아야 해서 서정치과엘 갔다. 그의 치아가 생김새도 토종 옥수수 같고 색도 누렇지만 동창들이 회식을 해도 갈빗살을 뜯는 사람은 자기 하나라고 자랑하던 사람이, 제네바에서 손주들 앞에 생니를 접시 위로 뚝 떨어뜨리던 날의 난감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송곳니가 빠진 그의 얼굴은 한순간에 폭삭 늙은 할베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하여튼 다음 주면 여섯 달만에 그 자리에 의치를 끼워넣는다.
어제 읽은 책(「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도 30도 안된 멋쟁이 대위가 총상의 고통으로 하루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새버렸다거나, 한참 풋풋해야 할 열아홉의 처녀가 사지에서 기어서 살아나오며 백발이 되었다는 일화는 상상이야 할 수 있지만 믿기지는 않는다. 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사투를 하다보면 무슨 일인들 안 일어나랴? 우리가 매일 하는 기도 중에 “그래! 이렇게 기도해야 해!”라고 공감을 주는 구절이 “주여, 한 평생 이 몸을 성하게 해주소서.”라는 시편 구절이다. 몸 하나 성한 것으로도, 사지가 멀정한 것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대모님이 오늘 글 한 편을 보내 오셨다. 한센씨병 권위자라는 풀브랜드 박사 이야기. 인도에서 20년, 미국에서 30년 무려 50년을 나환자들을 치료하며 일생을 보내온 분이어서 이 병에 관한 한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다 한 번은 긴 여행 후 발 뒤꿈치에 감각이 없는 것 같아서 바늘로 찔러보고 복숭아뼈 아래를 찔러보아도 통증이 없더란다. “드디어 감염이 되었구나!” 비참한 말로를 걷는 한센씨병 환자들의 모습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어서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자기 말로를 고민했단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한 번 바늘로 찔보고선 “으악!” 소릴 질렀단다. “이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 통증인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고통이여!”
2003년 7월 4일 대사 신임장 제정식날
어디 육체적인 통증만 고마운 일일까? 삶에서 겪는 내 마음의 고통도 살아있음에 대한 선물이고 타인의 고통을 동정하고 내 것처럼 느끼는 양심이야말로 하늘이 주는 커다란 선물아닌가?
오늘 보스코가 바오로딸 수녀님들의 “문화마당” 금년 첫 강연에서 「세상은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주제로 다루었다. 돌아가신지 10년만에 시성(諡聖)된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생애를 교회사에서, 세계사에서, 한국사에서 갖는 의미에 따라 설명해나갔다. 80년대 유학시절에 빵기, 빵고를 데리고 개인알현을 두어 번 했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대사로 그 교황님에게 신임장을 증정하면서 단독면담을 가졌던 분이 성인이 되어 계시니...
그런데 강연을 마치고 주고받던 질의응답에서 제주 강정얘기를 꺼내며 “(교황 프란치스코가) 세월호 가족을 다섯 번이나 만나게 만든 강우일 주교를 파문하라!”는 투의 어느 할메 질문을 받고서 행한 힘있는 그의 대답이 청중을 감동시킨 듯하다.
주류언론과 종편방송이 세월호 사건을 국민에게 망각시키려고 사건을 철저히 은폐한다든가, ‘엄마부대’니 ‘어버이연합’이니 하는 자들이 희생자 유가족의 농성장을 찾아가서 행패부리도록 조장하는 짓을 가리켜 “배달겨레의 양심을 문둥이로 만드는 악행”이라고 책상을 치며 탄식하던 보스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 명색이 그리스도신자이지만 실제는 ‘돈!’ ‘돈!’ ‘돈!’하며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이라는 증거”라고 지탄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일갈을 듣는 듯했다. 저 2005년 4월 2일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주님! 세상은 당신이 필요합니다!”고 하소연하며 숨지신 노인의 호소가 지금도 생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여하튼 대부분의 청중과 주최 측 수녀님들은 보스코의 신념어린 강연에 공감과 감사를 표했고, 수녀님들의 부탁으로 보스코가 대사직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번역 출판한, 「세상은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는 성 요한바오로2세의 전기를 구입한 분들에게 ‘역자 서명’(‘저자 서명’이야 있지만 ‘역자 서명’은 처음 듣는 얘기다)을 해드리면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흐뭇했다.
내 얼굴을 보더니 “휴천재일기의 독자”라고 소개하는 분들도 몇 사람 만나고, 평화방송에 나간 예고를 듣고 보스코 강연을 들으러 오신 오태순 신부님도 뵙고, 용인에서 당신네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러 찾아온 ‘대건기도회’ 김풍삼 노인의 사정도 귀기울여 들어드리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