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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4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1-30 09: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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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예레 1,4-5.17-19)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시편(70)

주님, 저의 입이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제2독서(1코린 12,31-13,13)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복음(루카 4,21-30)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 연중 제4주일 ~ 독서·복음해설 ~


제1독서(예레 1,4-5.17-19) 해설

<예레미야가 받은 소명>


제1독서 구절들에서 예레미야는 자기가 받은 소명에 대하여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를 사로잡는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태어나기 저부터 이미 주님께서는 그를 예언자로 삼으셨다(참조. 시편 139,16). 어떤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예레미야 예언자에게는 그 순서가 바뀌어 “나를 생각해 주신 분이 계셨기에 나는 존재하게 되었다.”가 된다. 예레미야는 이미 하느님께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다.


5절에는 ‘알다.’라는 동사와 ‘거룩하게 하다.’라는 동사 두 개가 같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알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지적 활동만을 가리키지 않고,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모두 포함한다. 우리 사람에게는 일생 동안 하느님의 계획을 언제나 분명하게 깨닫도록 허용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의 계획은 단순한 지식으로 습득할 수 없고, 신앙으로만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하느님의 계획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예레미야에게는 자기 생애가 미리 ‘예정된’ 생애요, 예언자로서 섬기는 생애라는 생각이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어떠한 곤경에 처할지라도 자기가 받은 소명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확신하며 당당하게 주장한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동사는 ‘거룩하게 만들다.’ 또는 ‘죄악을 씻어 깨끗하게 해 준다.’는 뜻이 아니다. 그 동사는 윤리적 가치가 아니라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동사는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하느님과 친교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맡겨진 사명은 모든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전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충동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거룩한 소명이요 하느님께서 지워주시는 고귀한 사명일 수도 있다. 그 소명을 따르고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온갖 고난과 박해를 당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자기 곁에 계시며 도와주심을 믿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시편(70) 해설

<주님, 저의 입이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오늘 전례에서 이 시편을 취한 목적은 예언자가 받은 소명과 사명을 분명히 하려는 데 있다. 그 소명과 사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난다.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한 사람은 결코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내 바위, 내 보루, 내 희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정의를 꿋꿋하게 공공연히 외칠 수 있다.


제2독서(1코린 12,31-13,13 또는 13,4-13) 해설

<사랑을 노래하는 찬가>


1코린 12-14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받은 수많은 특은에 대하여 말한다. 12,31-13,13에서 바오로는 그 모든 특은을 아우르면서도 그보다 뛰어난 사랑에 대하여 말한다. 이 찬미가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1-3절)에서는 사랑이 그 어떤 특은보다 위에 있다고 말한다.


둘째 부분(8-13절)에서도 사랑의 무한한 특성을 말한다.


13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함으로써 바오로는 사랑의 출중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베푸는 극진한 사랑을 사람이 본받으려하지 않는다면 어떤 명분으로도 다른 이웃에게 참다운 유익을 줄 수 없으며 인간사회에도 조금이나마 어떤 보탬이 되어 줄 수도 없다. 하느님다운 사랑만이 생명의 가치를 창조해 낼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보람 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복음(루카 4,21-30) 해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하여 파견되셨다>


오늘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행하신 설교가 나온다.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가 단 한 구절로(마르 1,15; 마태 4,17) 그 설교를 요약하고 있는 반면 루카 복음서는 그 설교를 기다랗게 묘사하고 있다. 그 설교는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수행하실 사명의 서곡이며, 그 안에는 예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설교의 기본 주제들이 들어 있다.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예수님께서 장엄하게 등장하여(4절, 14절, 18절), 이사야 61장에 나온 신탁을 낭독한 다음, 그 예언의 말씀은 바로 당신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는 회당 안에 있는 군중에게 물의를 일으킨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고장이 배출한 인물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그가 자기네와 똑같은 처지인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수군거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행한 활동을 익히 알면서도 믿을 마음이 언뜻 내키지 않는다(23절). 예수님께서도 빈정대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기적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마태 13,58).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을 수행하시는 첫 장면에서부터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생활하시는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려 한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당신 자신을 메시아-왕으로서 제시하셨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총을 내리시는 예언자로서, 주님의 종으로서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온 생애를 통하여 구약의 약속을 실현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은총을 거절한다. 이미 나자렛에서 칼바리아의 어두운 그림자가 엿보인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을 사람들이 가로막을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본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선민의식에 빠져 다른 민족들을 무시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겨난 목적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는 모든 백성에게로 가는 다리 구실을 다하리라는 것뿐이었다.


교회공동체도 그 자체의 세력 확장과 이권신장에 그 존재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백성과 모든 사람에게 건너가시도록 하는 다리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라는 데  있다. 교회공동체는 인류 공동체를 몸 바쳐 섬겨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다. 따라서 교회공동체는 사람이 만든 특정한 체계 속에 굳어져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새롭게 탄생되는 생명처럼 모든 백성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묵상

 

나는 너를 모든 백성의 예언자로 세웠다.


이번 주일의 말씀의 전례는 예언자의 소명을 강조하고 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사람이다. 그 누구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증거하려는 예언자의 앞길을 막지 못한다. 예레미야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예언자다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어차피 모진 박해를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랑이 흘러넘친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우연히 본의 아니게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인생살이가 덧없고 괴롭다고만 느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예레미야처럼 수태되기 전부터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로부터 미리 점지되고 거룩하게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5절). 예레미야는 자기가 너무 어리고 힘이 없다고 느끼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두려움을 느낀다(7절). 그러나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헤아리면서 그분께 사로잡힌다(9절). 예레미야는 단지 자신을 비운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께 순응하고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당신이 명하시는 바를 그저 단순하게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17절). 그 이유는 주님께서 몸소 옆에 계시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8절).


이렇게 보장을 받은 다음 예레미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된다. 이제 그가 하는 말은 온갖 불의를 발가벗기는 심판이 되고 그릇된 길을 사정없이 고발하고 단죄하는 심판이 된다. 그 때문에 그는 엄청난 박해와 반대를 당하게 된다(19절).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예언자를 없애지 못한다.


우리도 모두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명을 받아 온갖 거짓과 불의를 폭로할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배척당하는 예언자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외면하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고 예언자처럼 살아가고 행동하신다. 사실 그분과 더불어 ‘주님의 은총이 풍성하게 쏟아지는 거룩한 해’가 시작되었다. 그분 안에서 메시아를 예고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분이 고향에서 당신 주장을 입증하는 기적을 전혀 행하시지 않은 이유는 그분의 동향인들이 호기심만 잔뜩 있지 신앙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동향인들이나 동족이라 해서 구원에서 무슨 특권을 주려 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을 미리 피하신다. 즉 그분의 구원 계획은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에 독점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런 당신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어떤 예언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계획에 동참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언자들이나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처럼 자기네 울타리 안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리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그런 보편적인 구원계획이 자기네의 속된 이권과 세력유지 확장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으로만 예언자의 소명을 다할 수 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오로지 지적만을 보고 싶어 한 것처럼 코린토 신자들도 겉으로 드러나는 인기 있는 특은들만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코린토 신자들에게 어떤 특은을 청해야 할지를 지적하면서 그 특은들은 여러 가지인 것 같아도 결국 사랑이라는 특은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언어를 말하는 특은이나 넓은 지식과 큰 신앙을 받은 특은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진 바를 모두 나누어준다거나 순교하는 특은을 받았을지라도 그것이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행위가 아니라면 거짓이요 자기기만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만이 사람 사이에 참되고 올바른 관계를 맺어 주며 거짓과 불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사랑 외에 다른 온갖 특은은 사라질 것이고 사랑만이 끝이 없을 것이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이며 사랑만이 사람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 줄 수 있다. 진리와 정의를 부르짖는 외침과 예언이 가식적이고 환상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외침이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본받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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