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글을 기고하고 받은 원고료로 책을 한 권 사려고 대구에 갔었다. 대구 대형서점 2층으로 올라가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중간쯤 오르는데 갑자기 내 아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책은 못 사고 바로 집으로 왔다.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아우를 기다렸다. 사실 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내가 대구에 가기 전에 우리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하고 요양병원에 가셨기 때문이다. 아우가 오고 함께 영천시 금호읍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임종은 내가 대구에 들른 시간에 했다고 내 아우는 말했다. 내 아우는 할머니가 연신 “고맙데이”하면서 눈을 감으셨다고 말했다. 그리곤 편안히 세상을 떠나셨다고 말해주었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은 편안해 보였다. 그 앞에서 절을 하고 외가친척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아버지의 형제자매인 삼촌 두 분과 고모와 고모부도 오셨다.
농업이나 건축노동에 주로 몸을 담았던 아버지 집안과 달리 어머니 집안은 교사와 공무원들이 많다. 먼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서예가셨고, 외할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셨다. 먼저 돌아가신 또 한분, 첫째 외삼촌은 고등학교 교사셨다. 외할머니는 교사를 그만두고 가정주부로 사신 지 오래되었다.
나는 어릴 때 외갓집에서 놀기도 했다. 집 앞에는 텃밭이 있어 채소들이 자랐다. 할머니는 채소들을 캐어내 반찬을 만들어 대접해 주셨다. 어머니는 작년까지 외할머니댁에서 채소를 한 무더기 가져와 먹기도 했다. 한번은 고추를 너무 많이 가져오신 바람에 다 먹지 못해 아깝기도 했다. 책이 많은 방에 들어가서 책에 낙서도 했다. 다행히 야단은 안 치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도 했다. 외갓집을 방문해 집주변을 돌아다닌 기억도 있다. 외사촌들과 만나면 재밌게 놀기도 했다. 과학상식이 많았던 한살 위의 사촌형과 연도 날리고 폭죽을 터트리며 놀기도 했다. 마당이 넓어 2011년까지 명절마다 외가 가족들과 고기를 구워먹기도 했다.
가끔 집으로 전화해 어머니와 집 안 식구의 안부를 묻기도 하셨고 집에 방문해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다. 이야기를 나누다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와 놀다가 귀가하시기도 했다. 먼발치서 걸어오시는 외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우리 집에 오시거나 외갓집에 가서 놀다가 집에 갈 때가 되면 나와 아우에게 용돈을 주시곤 했다. 이에 어머니는 “주지마”라고 말리셨지만 막무가내로 내 손에 용돈을 쥐어주시기도 한 외할머니셨다.
어느 날 외갓집에 갔는데 십자가와 성모상이 눈에 띄었다. 그전까진 외가에 가톨릭신자가 큰 외숙부 식구와 막내 외숙모, 우리 어머니와 나밖에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칠순 이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뜻밖의 일이라 당시에도 놀랐는데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사실 장례식장에 가면 안 울기로 다짐했었다. 임종을 지켜보았던 아우가 한 이야기에 잠시 울컥거리긴 했지만 발인하는 날까진 울지 않았다. 발인하는 날, 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울었다. 외할머니께 “죄송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외갓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울었고 군위 가톨릭묘지에서도 어머니와 함께 울었다. 어머니는 늘 할머니와 함께 하셨다. 집안에서 하나뿐인 딸이라 늘 각별했을 것이다. 친척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외할머니는 나를 각별히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외갓집에 자주 방문하지 못하고 전화를 자주 해주지 못해 죄송스럽다.
지난 새해 첫날에 부모님과 내가 문안인사를 드리러 금호읍과 영천시 사이에 있는 요양병원에 계신 외할머니를 찾아뵈었다. 흰머리에 왜소한 몸이었지만 밝은 얼굴로 반겨주셨다. 집으로 갈 때 나는 해서는 안 될 말씀을 할머니에게 드리고 말았다. “다시 온다”고 말이다. 결국 외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다시 오고 말았다. ‘그때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하는 후회와 반성을 해본다.
외할머니의 장례식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각났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외할머니에 대한 각별한 추억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다른 신앙에 대한 존중’과 ‘요리’를 외할머니에게 배웠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르신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인사를 하고 가정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도 외할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외할머니 덕에 처음으로 장례미사를 드려보았다. 외할아버지는 주일에 장례식이 있어 사도예절을 드렸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농촌본당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었다고 한다. 의자마다 레지오 깃발이 걸려있었고 성모상과 작은 초가 보였다. 미사를 시작하기 전 묵주기도를 드렸다. 장례미사 끝에 헌화예식이 있었는데 외할머니와 각별했던 어르신들이 관을 어루만지며 이별을 하였다. 아쉬운 건 장례미사를 주례하던 주임신부의 강론이었다. 주임신부는 비그리스도인인 가족들에게 예의에 어긋난 말을 하였다. “아직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가족 분들도 이제 신앙을 가지라”고 말이다. 가톨릭 신자인 가족에게 하는 말이라면 이해하지만, 비그리스도인 가족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실례고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호에서 군위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먼 곳인지 몰랐다. 외할머니의 92세 연세만큼이나 길게 느껴지는 먼 거리였다. 외할머니가 묻힐 곳 바로 옆에 외할아버지 묘가 있었다. 저번에 이장을 했었나 보다. 그날 어머니와 나는 많이 울었다. 어머니는 “엄마, 고마워!”하며 할머니와 이별을 했다. 나도 이 글로써 외할머니께 이별을 고해본다.
“할매, 저를 사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편히 잠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