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일 월요일, 맑음
빵고 생일이다. 멀리 유학 가 있어 미역국도 못 끓여주어 마음이 짠했는데 걔가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에는 하얀 쌀밥을 말은, 색깔도 그럴듯한 미역국 한 그릇! “아들, 엄마를 찾아와서 엄마 아기로 태어나 줘 고마워!”라는 축하전활 하면서 누가 끓였느냐 물었더니 봉지에다 끓는 물만 넣으면 그런 미역국이 된다나?
뜨거운 물만 부으면 미역국이 되는 조촐한 생일상을 스스로 마련한 빵고이지만 이 어미가 걔에게 차려주고 싶은 생일상은 빵고의 어린 시절을 내 맘에 따스하게 되살려낸다. 어디를 가서 누군가 먹을 것을 주면 “우리 형도 있는데요.”라면서 언제나 형의 몫까지 챙겨오던 아이. 저녁식사 후에는 식구들 칫솔 네 개를 가지런히 놓고 일일이 치약을 짜놓던 아이. 비데에 물을 받아놓고서 아빠의 발을 고사리손으로 닦아드리던 아이. 몸이 아프면 소리소문 없이 집안 아무데나 누워서 잠들어버리던 아이.
갓난이 적에도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시장엘 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는 아기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 마구마구 달려오던 기억이 미역국 사진위로 겹쳐진다. 번역을 생업으로 하는 아빠 품에 편히 잠든 빵고를 들여다보느라 일의 속도를 못 내던 보스코. 아아, 하느님의 축복으로 우린 너무너무 좋은 아이들을 배급받아 너무너무 힘 안들이고 키웠고, 둘은 날개가 돋자 너무너무 수월하고 자유롭게 날아서 품을 떠났다!
오늘도 엄마에게 “낳아줘서 고맙습니다.”는 문자를 보내오고, 제 형은 시우를 시켜 “생일축하합니다, 삼촌!”이라는 노래를 보내고... 시아가 음악학원에서 콘서트하는 사진도 오고 동네 광장에서 찍은, 그 지역 동물 사진도 보내왔다. 아들들 손주들로 행복한 하루다.
오전에는 휴천재에 온 손님 리타랑 ‘함양 관광’을 나갔다. 우선 ‘기계 망가뜨리는 은사’를 받은 보스코의 노트북을 ‘갈아엎어야’ 해서다. 오티나선생이 이탈리아에서 보내는 이메일 아이디여서 안심하고 열었더니만 첨부된 바이러스가 노트북에 장착된 모든 파일을 오염시켜 놓고선 “어디 한 번 해 보슈. 아님 돈내고 프로그램 사던가.”라는 악독한 메시지가 떴다. 한글 파일을 빼놓고는 모조리 오염시키고 말아 ‘컴퓨터월드’에 맡기니까 한글파일 빼놓고 모조리 지우고 프로그램도 다시 깔아야 하는 작업이란다.
리타랑 상림 숲을 걷고, 샤브샤브 점심을 먹고, 그 추위에도 빙수를 먹고, 그 식당에 놀러온 꼬마들과 놀이도 하고, 드디어 오도재 쪽으로 지리산 관광을 나섰다.
오도재 올라가는 길에 눈은 말끔히 치워졌는데 길가에 하느님이 지난 폭설에 설치하신 수십 수백만 크리스털 샨델리아가 서쪽으로 기운 햇빛을 받아 찬란한 조명을 맘껏 자랑하고 있어서 눈도 맘도 발도 그 언덕길을 나아가지 못하고 붇박히고 말았다. 그곳을 지나가던 모든 사람이 차에서 내려 그 얼음꽃 환상에 한숨과 신음과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내 평생 일찌기 못 본 저 화려하고 빛나고 몽환적인 저 아름다움! 하느님은 정말 멋진 화가에다 조각가에다 설치미술가시다.
오도재를 넘어서 칠선계곡으로 들어가 서암을 방문하였다. 리타는 지장보살에게 공양미를 바치며 조카 혜진이 혜령이를 부탁드린다. 아마 지장보살은 성모님 친구쯤 될 게다. 리타에게는 그 두 조카가 친자식이다. 나는 속으로만 기도하며 “처녀가 되어 내 가슴이 꽃잎을 열 때에 그 주위에 향기와도 같이 떠돌아다니다... 누리의 생명의 흐름 밑에 떠 있다가 마침내 내 가슴의 암초에 걸린”(타골의 「초승달」) 빵고를,내가 오늘 새벽에 세상 빛을 보게 낳아준 작은아들을 성모님께 맡겨드렸다.
돌아오는 길에 도정으로 올라가 어제 살레시오수녀회 조각가 마틸다 수녀님이 체칠리아씨에게 보내는 도자기 두 점을 전했다. 수녀님은 체칠리아씨 엄마(수녀님 모친과 친구였단다)의 대녀로 우리에게도 같은 종류의 도자기 두 점을 선물하셨다. 그집 ‘솔바우’에서 건너다보는 와불산과 지리산 하봉에 눈꽃이 하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