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4일 목요일 맑음
어제 함양에 있는 삼성 A/S를 찾아가 진공소제기의 찢어진 고무파이프를 고쳐왔었다. 같은 모델이 없어서 다른 호스에 끼우는 손잡이를 뽑아서 바꿔준다. “이건 우리 집에서 사신 게 아니죠?” (물론! 20년도 훨씬 넘는데.) “그래도 잔소리 말고 고쳐줘요.”라는 내 눈총과 더불어 “아이, 좀 봐줘요.”라는 내 맘을 읽어선지 더 안 따지고 고쳐주었다.
시골에서는 가게 주인이 텃세를 하면 할머니들이 꼬리를 팍 내리는데 이 서울여자는 꼬리가 고양이처럼 싹 올라가고 앞발을 번쩍 들어 올리는 기미가 보이나보다. 발톱을 내보이며 공격자세로(?) 아무튼 대리점의 아줌마 사장님은 함양인답지 않게 친절하다. 그리고 이 고객 어깨에는 “전순란 절대 안 져.”라는 어깨띠가 둘러져 있나 보다.
어제 잘 고쳐왔나 보려고 보스코에게 “(어제 못한) 청소 좀 하시죠.”라니까 “나 바빠!”다. 식탁위에 가득히 펼쳐놓은 교정쇄에다 여기저기 고백록 연구서들과 외국어 주해본들을 갖다놓고 여기 들여다보고 저기 펼쳐보는 중이다.
한국의 그 까다롭고 잔소리 많은 엄마들을 한 마디로 손들게 만드는 그 비결을 보스코는 알고 있다. “엄마, 나 공부해!” 끝! 아들(?) 나이 일흔이 넘어도 그 비법은 유효한 세상! 하는 수 없이 휴천재 청소는 내 몫이다. 마루는 어제 닦았으니 대충하고 침실, 빵괴방(‘빵기’ + ‘빵고’ = ‘빵괴’), 긴방(손님방), 벽돌방, 서재, 층계, 부엌과 식당으로 닦아간다.
12시가 다 되어 손님이 오신다는 소식! 부항저수지 사는 박신부님이 통영 가는 길에 들르신단다. 청소가 막 끝난 참이어서 점심준비 돌입! 그분은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잡수신다. 혼자 사시니까 여자로부터 자유스럽겠지만 음식의 질에 있어서도 이미 해방되셨을 것 같다.
점심 후에는 보스코와 나에게 카이로프락틱을 시술해 주셨다. 점심 잡수신 칼로리를 다 쏟아 붓고도 부족했을 성 싶다. 이런 시술을 받고 나면 보스코는 잘 견디는데 나는 하루 이틀 몸살을 하곤 한다. “온 몸에서 뼈마디와 근육 사이를 분리시킨다.”는 것이 그분의 의술이다. 살과 뼈 사이로 신경과 혈관이 지나가므로 그 소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의술이란다.
며칠 전 자동차 사고(호남선에서 시속 10km로 가던 우리 차가 브레이크를 놓쳐 앞차 범퍼를 들이받은 사건)의 후속결과를 통지하는 보험회사 전화가 왔다. “차는 다 뜯어봐야겠고, 안사람과 초딩 아들은 괜찮은데 어머니가 차사고 후유증으로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는 피해차량의 주장이란다. 길게 따져봐야 요구사항만 늘어날 것 같아서 45만원으로 끝을 내고 왔노라는 보험직원의 보고. 멀쩡한 차라도 떼를 쓰면 저런 돈벌이가 되겠구나 싶어 나도 “자동차 충격 후유증 감기기운”이라는 병을 한번 앓아보고 싶다. 내년 그 가족을 그 길에서 그대로 만나고 싶다. 이번에는 그 기사가 뒤에서 받고 내 차가 앞에서 받히고...
나는 내려서 그 차에 다가간다. “어머, 다치신데는 없으신가요? 아하, 작년 그 기사님이시네? 일년 사이에 아들이 많이 컸네요? 부인도 여전하시고? 어머니는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그 남자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묻는다. “보험 써 드려야겠죠?” “보험은요... 받으라고 있는 게 범퍼 아녜요? 괜찮아요. 어서 가세요. 꼬마야, 너도 잘 가렴!” (한 해 전의 사건을 기억하는 아들이라면 “아빠, 나 그 할머니 보고 엄청 쪽팔렸어! 우리더러 그냥 가라니까. 아빤 작년에 돈 벌었다고 신났쟎아?”) 그런 일이야디 일어나랴만 사실은 그런 사람은 두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내게 이런 생각을 품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벌을 받은 거다.
내일 보스코가 치아를 해 넣는 날인데 원장님 모친이 별세하셨다면서 설 다음으로 예약을 미루는 치과병원 전화가 왔다. 친정어머니이신지 시어머니이신지 모르지만 우리 집 식구 전부의 이빨을 담당하는 곽선생님 집안의 초상이니 내일 상경 길에 문상을 해야겠다.
그믐으로 기우는 지리산 새벽달을 보스코가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