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보궐선거가 끝났다. 집권당이 선거에서 또 이겼다. 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허탈해 한다. 그 정도 집권당이라면 벌써 여러 번 당을 자진 해체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8인중 4인이 개신교 성도요 2인이 가톨릭 신자다. 역사상 최고로 무기력한 야당이 있는 시대에 착한 국민들만 불쌍하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옳은 사람과 힘 있는 사람 중 선거에서 누구를 선택할까. 끔찍한 사건을 자주 겪은 백성은 옳은 사람보다 힘 있는 사람을 고르는 것 같다. 살려면, 살아남으려면, 비굴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험악한 체험에서 나온 체념이 선거에서 일상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힘 있는 사람에게 빌붙는 현상이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에도 마찬가지다.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면, 힘 있는 자에게 붙어야지 별 수 있어?"라며 부패한 종교인 주위에 빵 부스러기를 노리는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개혁 역사가 없는 집단은 개혁을 시도하기도 전에 미리 체념한다. 체념을 미리 배우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 체념학습이 널리 퍼져 있다. 개혁은 어차피 안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해 버린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나 단체를 빈정거리고 헐뜯는다.
조규만주교의 말은 이미 유명하다. “교황님이 다녀가셨는데 왜 한국교회는 바뀌지 않느냐?‘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정도로 교회가 바뀔 것 같으면, 우리 교회는 수도 없이 탈바꿈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주교가 했다니, 말문이 막힌다.
그리스도인은 절망이라는 유혹과 싸워야
소심했던 예수도 세상에 나타나기를 오래 주저하였다. 그런 예수를 사람들은 핀잔했을 것이다. 예수는 무지몽매한 백성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백성과 함께 애환을 나누면서 백성을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였다.
예수처럼 백성을 원망하지 않고, 백성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자신을 희생하는 정치인이 그립다. 정치인은 절반은 종교인이다. 정신자세가 그래야 한다.
괴테가 말했다던가. 인류는 변했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고. 인간이 사는 세상은 크게 변했지만, 인간 개개인의 품질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한탄이겠다. 그러나 절망이 정답은 결코 아니다. 절망을 사람들에게 권유할 수는 없다. 체념을 이기지 못하면 희망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절망이라는 유혹과 싸워야 한다.
절망이 마치 정답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그러나 절망은 정답이 아니다. 이런 세상에서 언론인, 지식인, 종교인의 회개가 시급하다. 특히 종교인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세상을 썩게 만드는데 많은 종교인이 앞장서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종교마저 썩는다면 우리가 어디서 희망을 찾는단 말인가. 사회민주화뿐 아니라 교회쇄신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