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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사순 제2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2-20 11: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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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창세 15,5-12.17-18)

<하느님께서 충성스런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신다.>


주님께서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맹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냈다.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시편(26)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나이다


제2독서(필리 3,17-4,1 또는 3,20-4,1)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루카 9,28ㄴ-36)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졌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 사순 제2주일 ~ 독서·복음해설 ~


제1독서(창세 15,5-12.17-18) 해설

<하느님께서 충성스런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다>


이 대목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이며 야휘스트 전승과 엘로이스트 전승에 의해 기술되었다(제관계에 속하는 구절은 17절이다). 여기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당신 호의로써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어 주신다.


15,5-7 부분에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장차 베풀어 주실 약속이 나온다. 12,2에서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고 하신 약속과 똑같은 약속이다. 이 첫째 말씀 부분에 하느님께서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자기 고향으로부터 떠나도록 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둘째 말씀이 덧붙여진다. 그 이유는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그 땅의 귀퉁이 한 조각밖에는 차지하지 못했다. 자기 아내 무덤을 쓴 막펠라 동굴이 있는 밭이 고작이었던 것이다(참조. 창세 23 1-20).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르다.’고 신임해 주셨다. 사람으로서는 사람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람의 주인(주님)이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애착하고 사람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따르는 것이 합당하고 올바른 태도이다. 이 대목이 바오로가 하느님으로부터 공으로 받은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올바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는 기본적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갈라 3,이하 ; 로마 4,1-25).


둘째 부분(8-18절)에는 계약이 체결되는 장면이 나온다. 계약을 체결하는 이 예절은 당시 중동에서 흔히 사용되던 예절과 비슷하다. 그 예식 형태는 동물을 반으로 갈라놓고 계약을 맺은 쌍방이 그 사이를 통과하면서 만일 계약을 위반하면 반으로 갈라져 죽은 동물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각오를 다짐하게끔 하였다(참조. 예레 34,18).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느님 혼자 불의 형태로 반으로 쪼개진 동물 사이로 지나가시고 그 사이 아브라함은 ‘신비경’에 빠진다. 마치 아담이 하느님께서 자기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실 적에 잠에 떨어진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체결하여 주심으로써 약속을 실현해 주시는 분이 오로지 당신뿐임을 밝히 드러내신다.


나일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땅을 주실 분은 하느님뿐이시다. 히브리인들은 수동적일 따름이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다소곳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사람들이 꾸리는 사회를 더욱 따뜻하게 가꾸어 주는 온갖 좋은 것과 참된 복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느님께서만이 주실 수가 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신뢰하며 그 말씀을 실천하도록 노력함이 마땅하다.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허영심, 경쟁심, 사기 따위의 감정들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할 뿐 결코 완성해 주지는 못한다.


시편(26) 해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나이다>


이 시편은 주님을 영접하는 시편이다. 보잘것없게 보이고 천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실지로는 하느님께서 가장 애착하시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 하찮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아울러 무능력을 인정하고 자신 힘으로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음을 절절히 느껴 하느님 아버지만이 자기 구원자요 생명의 바위임을 알고 그분께 온 힘으로 매달린다. 이것이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합당한 자세다. 이런 겸허하고 진실한 사람들이라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복으로 채워 줄 수 있고 그들을 유혹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며 악에서 구해 줄 수 있으시다.


제2독서(필리 3,17-4,1 또는 3,20-4,1) 해설

<그리스도께서 당신 광명의 육신을 닮게 하시리라>


이 대목에서 바오로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고 말한다(18-19절). 여기서는 아마 ‘십자가의 길’이 아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고 고집하는 ‘유다인’들과 그들의 주장을 따르는 이방인 출신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이 십자가의 원수인 까닭은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능력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속된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사람들’과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가꾸어 가는 사람들’을 대조한다. 바울로는 남보다 뛰어나서 재력과 권력을 자랑하고 약자들을 억누르고 싶어 하는 무리들에게 올바르게 사는 길이 십자가의 길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모든 사람 앞에 영광스럽게 드러날 것임을 암시해 준다.


복음(루카 9,28ㄴ-36) 해설

<기도하실 때 그의 모습이 달라졌다>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를 존중하면서도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 이야기를 더 잘 알아듣게 하려고 자기의 고유한 몇 가지 요소들을 덧붙인다.


먼저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음을 밝혀 준다(28절). 이것은 루카 복음서 저자가 즐겨 사용하는 주제이다(참조. 3,21; 5,16; 6,12; 9,18; 11,1; 22,41). 이 주제는 항상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중대한 순간이 임박했을 때 등장한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십자가 나무에 매달리러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고 뒤에 가서 자기들이 받은 소명을 다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달게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다(9,23).


루카 복음서 저자는 또한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덧붙인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24,4)에 나오는 표현과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진다(참조. 1코린 15,3-4).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 탈출 사건을 통하여 약속된 땅으로 인도한 인물이고 엘리야는 불붙은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인물임을 잊을 수 없다(참조. 2열왕 2,11-12).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가 미리 나타낸 바를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실현하셨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목소리’도 다른 공관 복음서들과는 약간 다르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다.” 루카 3,22에서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표현은 시편 2,7에 나오는 ‘메시아-왕’과 똑같은 표현이다. 이제 그 목소리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라고 정확히 말한다. 이 칭호는, 루카 23,35에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께 던진 유혹하는 말로 다시 되풀이되지만, 이사 42,1(참조. 49,1)에 나오는 고통 받는 종을 상기시킨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이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인류 구속을 위해 죽어야 할 ‘종’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제 예수님과 당신 제자들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통과하여 하느님과 친밀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 즉 하느님의 영광인 부활에 도달하게 된다. 오늘도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의 인생은 많은 사람들을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 운명은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 도달할 운명이다.


묵상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영원한 고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현실과 역사를 나 몰라라 하는 잘못을 곧잘 저지르곤 한다. 그래서 자칫하면 인간적인 사회건설과 사회적인 책임에 자기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만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변모 때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커다란 감동에 휩싸여 외쳤으면서도, 죽으러 가시는 예수를 놀래서 말린 적이 있었다. 이번 주일 독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장차 변형되고 영광을 차지할 운명을 가지고 있음이 사실이지만, 그 전에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나날이 들이닥치는 시련과 유혹을 거슬러 싸우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고통과 수모와 십자가와 죽음까지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현실과 역사를 외면하는 도피처가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사람들의 삶을 비추어 주고 바로 그 삶 안에서 발효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이 시작한 구원계획을 실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펼쳐진 구원의 사건들을 가려내고 용기 있는 자세로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있어야 하며, 사건들 속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럴 경우 예전에 누리던 안일하고 편안한 생활로부터 뛰쳐나와 보장되지 않는 미래에 자신을 내맡기라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구원사건 속에 뛰어들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 자신을 포기하라는 뜻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와 굳건한 바위임을 믿고 자유를 얻기 위해 온갖 난관을 헤치고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요, 참된 신앙생활이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온전히 실현되고 하느님의 구원 활동 전체가 펼쳐진다. 즉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조건을 고스란히 당신 것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4)


그분은 나약한 인간 본성을 귀찮다 하지 않으시고 고난과 고통을 달게 받고 구체적인 당신 삶으로써 사람들과 연대를 맺고자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종의 신분을 취하여 사람들이 악에서 벗어나도록 각 사람 안에 당신 모습을 새겨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부터 당신 계획을 선언하셨는데 그 계획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짓눌리는 사람들을 해방하려는 계획이었다(참조. 루카 4,18-19). 이 같은 도전적이고 혁명적인 선언은 팔레스티나 모든 도시와 읍내에 불길처럼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쳐놓은 질긴 올가미와 사슬을 끊고 분열과 증오의 어두운 세력으로부터 사람들을 벗어나게 하는 구원사업을 완수하려 하신다. 즉 그분은 아주 새로운 생활방식을 인류역사 안에 들여보내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사람들이 정말로 하느님과 친밀하게 만나려면 이기적인 기도와 신심을 벗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제압하고 그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고 싶은 욕구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내주고 희생하여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바로 세상에서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임을 깨달아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그 길은 다른 외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몸을 다 바쳐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길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마누라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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