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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사순 제4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3-05 10:4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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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여호 5,9ㄱ.10-12)

<하느님의 백성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해방절을 지냈다>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파스카 축제 다음 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시편(33)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제2독서(2코린 5,17-21)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


형제 여러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루카 15,1-3.11-32)

<너의 저 아우는 다시 살아났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사순 제4주일 독서·복음해설



제1독서(여호 5,9ㄱ.10-12) 해설

<하느님의 백성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해방절을 지냈다>


이 대목은 여호수아기 첫째 부분에 속한다(1-12장). 이 부분에서는 약속된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석가들은 이 대목의 전례적 성격을 강조한다.


히브리인들은 요르단을 통과하여 약속된 땅을 향해 진군하며(3-4절), 예리코 평야에서 첫 해방절(파스카)을 지내고 할례를 받았다(5절). 예리코를 정복한 날을 기념하여 축제를 지냈다(6절). 그러나 여호수아기는 단순한 정복 이야기가 아니라, 약속된 땅에 관한 신학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그 같은 관점에서 오늘 독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집트 탈출 과정이 끝나고 이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 새로운 출발의 순간을 세 가지 요소로 구분하고 있다.


1. 히브리인들에게 행한 할례(5,2-9)

이 할례는 모세 자신이 자기가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할 때 자기 아들에게 행한 할례를 떠올리게 한다(탈출 4,24-26). 저자는 아마 이집트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2. 해방절 축제(5,10-11)

이 축제는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맨 처음으로 지낸 해방절을 돌아보게 한다(참조. 탈출 12).


3. 내리던 만나가 그친다.

이제 히브리인들은 약속된 땅을 가꾸어 그 소출로 먹고 살아야 한다(5,12).

이상 세 가지 요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땅에서 수행해야 할 기능을 정해 준다. 그 기능이란 율법에 순종하고(할례가 그 표시 가운데 하나다.) 해방절의 절정인 경신례를 바치며, 땅을 잘 가꾸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출되고 해방된 우리 모든 사람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축제인 파스카축제(해방절 기념)를 바치고,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고 명하신 계명을 충실히 지켜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땅의 소출을 골고루 나누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한다.


시편(33) 해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하느님께서는 가진 것 없는 가엾은 사람들을 그 모든 궁핍과 고통과 고뇌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분이시다. 가진 것 없는 가엾은 사람들이라야 하느님을 향하여 애원하고 간청하며 구출하여 주시기를 부르짖는다. 그러나 스스로 자만하여 잘난 체하며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야 참된 평화와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구원을 간청하는 사람에게만 내려진다. 즉 구원은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내려진다는 말이다.


제2독서(2코린 5,17-21) 해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


몇 구절뿐이지만 이 대목은 의미가 깊다. 바오로는 여기에다 그리스도론적 신비를 모두 담는다.


무엇보다 먼저,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이 나온다(18.19.21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세상과 화해를 이룩하셨다. 따라서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그 화해를 무효로 만들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죄인 취급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십자가 형틀은 실은 우리가 져야 할 사형 틀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언자들이 예고한 ‘분노가 내려지는 날’이다(참조. 아모 5,18-20; 이사 2,12이하; 스바 1,14-18; 요엘 2,11 등). 이제 십자가는 죄악이 용서받고 세상이 하느님과 화해했음을 나타낸다.


거기에서 두 가지 결과가 나온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가 아닌 다른 것을 세상에 선포해서는 안 된다(18,20절). 그리고 모든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20절). 따라서 모든 사람은 성령께서 자기 안에 그 화해를 이루어 주시도록 간청해야 하며 ‘옛 사람’을 벗어던지듯 청산하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새 사람’으로 변하고 바뀌어야 한다.


복음(루카 15,1-3.11-32) 해설

<네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


오늘 복음에서 다음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 이 비유는 죄인들과 더불어 밥을 함께 드시는 예수님과 그것을 비난하는 바리사이들 및 율법학자들을 대조한다(1절과 2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 하느님께서 품고 계신 생각과 마음과 입장을 밝히신다. 그 죄인들은 자기들의 무능력과 비참함을 절절히 깨닫고 인정하면서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여기서 내가 굶어 죽는구나!”(17절). 한편 세리들도 물질적으로 먹고 살 만큼 넉넉하지만 모진 비난과 멸시를 받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겉모습을 보시지 않고 마음속 깊은 데를 헤아리고 판단하는 분이므로 그들이 죄인으로만 취급받지 않는다.


- 스스로 떳떳하고 죄진 일이 없다고 자신하고 자기는 천당 입장권을 이미 따놓은 것과 다름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무식하다고 무시와 천대를 받는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예수님과 친해질 수 없다.


이 비유로써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당연한 권리처럼 아버지 집에 들어갈 수 없음을 설명하신다. 아버지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이들만이 은총으로 그 권리를 받는다.



묵상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오늘 복음은 아버지 하느님을 모시기 싫다고 떠나간 사람에게 밀어닥친 비극적인 상황을 알아듣기 쉬운 감동적인 생생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을 떠난 사람은 쓰디쓴 허탈감과 정신없이 쫓기는 불안과 고뇌, 그리고 어지러운 사회생활 안에서 고독과 절망을 벗어날 길이 없다.


하느님 아버지 없이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려는 사람은 자칫 방탕과 범죄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깊이 깨닫고 뉘우쳐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서 따르는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유일하신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을 때 위대한 사회를 이룩하려는 온갖 노력은 아귀다툼으로 변하고 만다. 또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라는 사실 외에 그 어떠한 이유로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한다거나 자신을 내줄 수가 없으며, 형제자매인 사람이 내게 낯선 타인으로 남고 만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하루에도 수만 명씩 굶주려 죽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고 전쟁과 내전이 일어나도 나와 내 가족만 편안하면 그만이다. 하루빨리 아버지께로 돌아가 당신을 모시고 모두 함께 형제자매로 살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라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초대하신다. 지금까지 과거가 어찌되었든 깨끗이 잊고 과감히 돌아서서 당신과 더불어 아버지께 가자고 부르신다. 다시는 뒤를 돌아다보지 말고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따뜻하게 손잡고 똑같은 형제자매로서 아버지께 더 가까이 다가가라고 초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당신께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과거가 아주 더럽고 잘못되었을지라도 눈물을 흘리시며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신다. 이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꾸 비뚤어져 가고 있는 아들일지라도 그 아들이 한시바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바른 사람이 되기를 빌며 기다리고 있는 심정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모범적인 아들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이 쏠리는 쪽은 비뚤어져 가는 아들 쪽이다. 어진 아버지는 이미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있다. 나약하기에 죄를 범하기 쉬운 우리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복음인가? 하느님께서 엄격하게 심판하려고만 하신다면 당해 낼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과 같이 우리도 자비와 용서로 서로 감싸 주며 나아가는 것이 하느님을 닮아 가는 삶의 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은 우리가 잘못된 길에 떨어졌을지라도 그렇듯 애타게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어 잘못된 생활방식을 뿌리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을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로 여기며 그리스도께서 형제자매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의 죽음을 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잘못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대신 치러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에 부활의 영광을 누리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영광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갈 때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올바른 삶의 길이 방향 지워질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마누라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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