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당시의 수많은 재가자들 중에서 아직까지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는 이들이 꽤 여럿 있다. 파세나디 왕과 빔비사라 왕 · 위제히 왕비와 말리카 왕비 · 시하 장군 같은 지배 귀족에서부터 붓다의 주치의였던 지바카, 후에 아나따삔디까(Anathapindika; 給孤獨長者)라는 명예로운 칭호로 더 잘 알려진 수닷따(Sudatta) 장자와 같은 사업가들, 마지막 공양을 올린 장인(匠人) 춘다, 환락가 여인 암바팔리, ……
그런데 이들 가운데 수닷따 장자만큼 한국 스님들이 관심을 갖고, 신도들에게 “그를 닮아보라!”고 강력하게 권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스님들은 왜 그렇게 수닷따 장자를 좋아하고, 신도들이 그를 롤 모델로 삼기를 간절히 원할까.
사업차 떠난 여행에서 만난 친구에게서 “부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대중을 위해 진리를 설하신다”는 말을 듣고 반가움과 설렘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수닷따는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가 법문을 듣고 곧바로 귀의한다. 그리고 부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우안거(雨安居)를 안전하게 나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드리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이렇게 해서 지어진 절인 저 유명한 기원정사 건립 과정은 아주 잘 알려져 있어서 굳이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과 제자들을 위해 절을 지어드린 사람’들은 수닷따 말고도 많았지만, 당시뿐 아니라 2,6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가 유명해진 이유가 있다. 부처님께서 원하는 조건에 딱 맞추어 정사(精舍)를 짓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의 소유자인 왕자가 그 땅을 팔기 싫어서 억지로 내세운 이유였던 “저 땅을 모두 덮을 수 있는 황금을 내면 팔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겼다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수닷따는 평소 가난하고 고독한 사람을 잘 도왔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아나따삔디까(給孤獨長者)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붙여 본명인 수닷따보다 그 이름으로 부르는 데에 익숙했다. 이런 그가 부처님과 승단을 위해 불교 역사 최초의 절을 건립하여 공양을 올렸으니 그 공덕은 더욱 클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불교에서는 이 수닷따가 ‘엄청난 액수를 들여서 절을 지어드린 신심 깊은 재벌’ 이야기만 강조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잘 도와주는 사회사업가 수닷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혹 언급을 하게 되어도, “그 넓은 땅에 황금을 깔아서 …… 기원정사를 지어드렸다. 이런 보시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 끝에 양념으로 슬쩍 집어넣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분위기는, 20여 년 전부터 부처님 오신 날 법문에서 ‘빈자(貧者)의 일등(一燈)’ 이야기가 점차 사라져갔던 것과 같은 이유와 배경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특정 스님이나 종단이 아니라 한국 불교 전반에 이런 흐름이 흐르게 되니까, 돈이 많거나 큰 권력을 가진 재벌이나 정치인들 중에 불교인이 있다고 알려지면 그에게 “절을 짓고 탑을 조성하는 일도 좋지만, 그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부처님 제자가 할 일입니다”며 급고독(給孤獨)의 길을 권유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잘 보여서 절을 크게 짓거나 오히려 수행환경을 해치는 거대한 석조물을 세워달라고 부탁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정부 예산 지원을 많이 받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탈종교(脫宗敎)의 흐름이 점점 거세지는 현대 사회에서 한국 불교가 살아남아 부처님 가르침의 맥을 이어가려면, 부처님께서 이 수닷따 장자에게 ‘돈을 버는 방법과 그것을 쓰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일러주셨던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리고 보편적인 진리 ‧ 윤리 도덕과 사회 법규에 어긋나지 않게 재물을 모아야 하고 남의 것을 훔치고 빼앗거나 투기를 해서 얻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부모와 아내 ‧ 자식 등 가족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종업원과 노동자들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시키는 것이 돈을 버는 첫 번째 이유이고, 그 다음으로 친구와 친척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며, 절에 가서 출가 수행자들을 위해 보시를 하는 것은 맨 마지막 다섯 번째 이유일 뿐입니다.(『앙굿따라니까야』5:41; 대림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126~128쪽 참조)
이런 사실을 놓아버리고 오로지 ‘많은 돈을 보시한 부자’만 강조하려면 앞으로는 차라리 급고독장자 수닷따 이야기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급고독이 빠진 장자, 어려운 이들을 도울 줄 모르고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이기적인 부자’들에게 신물이 난 국민들의 울화병을 더욱 깊어지게 하지는 말아야하지 않겠는가.
※ 이 글은 계간 《불교평론》 2016년 봄호의 ‘사색과 성찰’에 <급고독 장자를 생각하며>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