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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사순 제5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3-12 10: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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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43,16-21)

<나는 새로운 것을 이룩하고 내 백성에게 마실 물을 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 속에 큰길을 내신 분, 병거와 병마 군대와 용사들을 함께 나오게 하신 분. 그들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꺼져 가는 심지처럼 사그라졌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들짐승들과 승냥이와 타조들도 나를 공경하리니 내가 선택한 나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는 샘을 내고 사막에는 강을 내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 


시편(125)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나이다>


제2독서(필리 3,8-14)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기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


형제 여러분,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미 그것을 차지하였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요한 8,1-11)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먼저 돌을 던져라>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사순 제5주일 독서·복음해설


제1독서(이사 43,16-21) 해설

<보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시작하였다. 나는 내 백성에게 마실 물을 주겠다>


이 본문은 이른바 제2이사야의 예언에 속한다(이사 40-45). 제2이사야는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귀양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에 찬 소식을 선포한다(참조. 40,1).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당하는 귀양살이를 끝나게 하신다. ‘주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구원자)’로 키루스가 부름을 받아 세워진다(45,1). 정말 키루스는 주전 538년에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 준다는 칙령을 공포한다(참조. 에즈 1,1-4).


제2이사야는 구원의 신탁을 전한다. 모든 백성 앞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주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하고 비교한다. 주 하느님만이 유일한 하느님이시며, 하느님 외에는 아무 구원자도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한다. 두 가지 판결이 내려진다. 바빌로니아가 망하고(14-15절)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선언한다(16-21절).


구원의 신탁은 과연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16절 이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전례에서 기념하고 있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준 하느님이시다. 이집트 탈출이라는 첫 번째 해방을 생각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 위대한 새로운 해방을 주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바다 속으로 길을 내고 광야에서 길을 열어 준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구원의 신탁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해방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에도 기초를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바빌로니아에서 해방함으로써 당신이 과연 주님임을 다시 깨닫고 찬양하기를 바라신다(21절). 구원은 하느님께서 참으로 당신 백성의 주님이 되어 주시는 데 있고, 백성으로서는 그분의 지시를 착실히 따르는 데 있다.


끝으로, 이 신탁에 종말론적 성격이 드러난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과 모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을 착실히 섬기고 주님을 찬양하면, 그것을 보고 온 세상이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켜 세우신 최종 목적은 당신의 복을 모든 백성에게 내리려는 것이었다(창세 12,3).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워진 목적도 자기네끼리만 모여 친목단체처럼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그리고 멀리 있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르게 살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찬양하도록 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라는 데 있다.


시편(125) 해설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나이다>


귀양살이가 끝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경위와 역사를 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인 빛에 비추어 다시 음미하는 시편이다. 실상,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사실과 메시아의 출현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사실은 장차 메시아께서 결정적으로 오시리라는 하나의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편은 아마 첫 곡식을 봉헌하려고 순례의 길을 오르면서 노래 부른 시편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순례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고백이기도 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오르면서 어느 날엔가 모든 백성이 주님의 법을 듣고 평화를 얻기 위해 그리로 모여들리라고 믿었다(참조. 이사 2,1-4).


주일에 교회에 나가는 신자들도 항상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교의 계명을 착실히 실천하여 평화를 얻게 되기를 기원하고 노력해야 한다.


제2독서(필리 3.8-14) 해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이방인들에게도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려는 유다인들에게 맞서 벌이는 논쟁이다. 그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만으로는 구원에 충분치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하느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 및 자연과 맺게 된 ‘올바른 관계’(의화)가 율법을 지켜서 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공으로 주시는 선물과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알아 모시는 일은 인간 자력과 자격과 능력과 공로로써 의당한 것처럼 얻을 수 없는 무한히 크고 고귀한 은총이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알아 모시는 일은 결코 지식에 그치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과 닮게 하고 같아지게 하시는 ‘사랑의 끈’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승살이 동안에는 당신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게 하고, 죽은 다음에는 당신 부활에 동참하게 하시는 사랑의 끈이다.


그렇다고 이 신비가 우리를 두 손 놓고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모든 사람・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의화)이 사람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벗어난 위대한 사랑의 선물이요 끈이라 할지라도, 사람 편에서도 자기를 비우고 열어 놓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은총으로 받은 그 올바른 관계를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사회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로 애쓸 필요가 있다. 목표를 향하여 온 힘을 기울여 달려가고(14절),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마음껏 활약하시도록 해드려야 할 필요가 있다.


복음(요한 8,1-11) 해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이 일화를 쓴 저자가 누구이든지, 우리는 이 일화를 8장 전체 문맥 안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8, 12)라고 말씀하시고,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8,15)고 말씀하신 점과 연관 지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적대하던 사람들이 간음하다 붙들린 여인 하나를 예수님 앞에 꿇어 앉혀놓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침해하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하고자 한다(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랑과 자비를 늘 앞세우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율법에 간음한 사람에 관한 규정이 나와 있다(신명 22,22-24). “이웃집 아내와 간통한 사람이 있으며, 그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참조. 레위 20,10-24)


적대자들이 던지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땅바닥에다 무엇인가 쓰며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하신다. 땅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행동의 의미는 분명치 않지만, 예레 17,13에서 그와 유사한 구절을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3)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생수의 샘이시라고 선언하신 적이 있다(7,38).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다 글씨를 쓰심으로써 당신은 사람을, 겉모양을 보고 판단하지 않고 마음속 품은 생각을 꿰뚫어 판단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8,16에 나오는 ‘진실된 심판’을 내리신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실천 여부에 따라 심판하지 않고(참조. 필리 3,9), 사랑과 자비의 실천 여부에 따라 심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며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용서만이 사람들이 서로를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용서받은 자는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다고 확고하게 결심하고 결심한 대로 실천해야 더 나아진다.


묵상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사람이시다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라는 시편 104,30의 말씀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라는 시편 51,12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깊은 반향을 일으킨다.


우리는 늘 자기 처지에 불만이기 일쑤이며, 좀 더 달라지고 좀 더 나아지려 애쓴다. 사람을 더 많이 사귀고 활동 영역을 더 넓히며 거처하는 집 또한 좀 더 넓고 편한 집으로 이사하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보려 열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어떤 사람으로 바꾸어지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는가?


사순절 마지막 주일인 오늘 독서는 마음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근본적인 혁신과 변혁을 요구한다. 개인 마음만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출발하는 제반 인간관계와 사회의식과 관습과 제도와 법률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근본적인 혁신과 변혁을 요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길을 발견한다.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새로운 생수와 새로운 생명이 인류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당신의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키셨다.


이 혁신과 변혁은 외부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과 인간관계와 모든 사회의 깊은 뿌리를 바꾸는 새로운 창조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이 자연법칙에 따라 살고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이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셨다. 그분 역시 자기 나라가 처한 상황과 변천 한가운데서, 특정한 사회와 역사 조건 밑에서 생활하셨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살면서, 그 삶 속에 온 인류를 껴안으셨다. 그리하여 민족 전체와 인류 전체를 받아들이고 껴안는 것은 그저 입으로 떠들어 댄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가장 하찮게 보이는 삶으로, 다만 몇 사람과 씨름하며 사는 그 속에서 정말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는 실업자, 빈민, 농민, 중소기업과 영세기업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서민의 치열한 삶으로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셨다. 가장 가까운 부부와 부모와 자식과 친척과 친구와 가장 사람다운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 할 때에는, 그 관계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민족 전체와 인류 전체의 문제가 녹아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관계들은 비인간적이고 거짓됨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순서는 큰 것을 생각하고 큰 것을 이루려는 욕심이 아니라, 가장 작은 것에 충실한 겸허한 자세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사람들 눈에 큰일을 할 수도 없다. 크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엄위로우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해서 황제처럼 대접받으며 대우받으려 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보잘 것 없는 팔레스티나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으로 자기 나라와 자기 백성이 정말 살길을 열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셨을 따름이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삶과 길이 그러했으니, 그리스도의 사명에 동참해야 하는 모든 사람이 취해야 할 삶과 길 역시 인간적인 여러 가지 제약을 회피하거나 벗어나려 함이 없이 가장 가까운 구체적인 인간관계와 사회관계에서부터 가장 인간적인(하느님의 자녀답게 아주 새로운) 행동을 취하고 처신을 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자기가 관계를 맺고 처해 있는 구체적인 사람과 종족과 문화와 종교를 있는 그대로 만나며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새로운 관계와 집단과 사회를 창조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움을 창조하시는 성령과 그 새로움은 모든 사람과 종족과 문화와 종교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든 이미 시작되어 있으며, 어떤 경우 상당히 놀라운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한, 그 어떠한 인간적 제도와 그리스도교 공동체라 할지라도, 성령을 독점할 수 없으며, 자유로우시고 헤아릴 길 없는 성령의 활동을 제약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릇 예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스도의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과 종족과 문화와 종교 속에서 힘차게 끊임없이 거듭 새로움을 창조하시면서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신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마누라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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