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9일 토요일, 지독한 황사
서울이란 도시가 워낙 이랬던가? 짙은 황사로 500m 앞이 안 보인다. 자연도, 사람도, 게딱지 같이 볼품 없는 집들도 가까운 것들만 어슴푸레 흔적처럼 보일뿐. 이 외롭고 슬픈 도시에서 수십 년을 살다 떠났지만 이 동네의 본 모습은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아득한 기억에서만 다정하던 이웃들이며 고만고만한 가옥들과 그 작은 정원들이며 골목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가슴을 따스하게 덥혀 줄 뿐...
마을 입구, 소위 '제헌로' 양편에 짙은 녹음을 이루던 은행나무 행렬도 최근에("지구를 지키는 불사신" 전순란이 없는 새에) 덕성여대가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고 나니 황량하기 그지없고 그 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경고문도 교육기관의 문안치고는 참 살벌하다.
덕성여자대학교가 약초원 철조망에 붙인 현수막
우리 집 쪽은 그래도 ‘국민주택’이라면서도 땅이나마 제법 평수가 나와 팔리는대로 다세대 주택(또는 원룸빌딩)이 들어서는데, 새로 들어온 이들은 ‘그림자 사람’들인지 도통 눈에 띄질 않는다. 새벽 일찍 나갔다 밤늦게 들어오는, 그야말로 잠만 자러 들어오는 사람들인가 보다. 아래층 엽이가 들어오는 것도 자정이 다 되어 대문이 딸깍 열리는 소리로 알고 꼭두새벽에 대문이 딸깍하는 소리가 그의 출근이듯이, 지금 대한민국 젊은 세대의 각박한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주거풍경이다.
우리 앞집 원룸도 가끔 우리 골목길에 내던져진 담배꽁초가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유일한 흔적이다. 준공검사 때문에 심었던 나무마저 한두 해에 뽑아버리고 시멘트로 발라 주차장으로 쓴다. 예전에 3, 4층집 높이만한 목련나무가 자라던 자리에서 간간이 창들이 열리고 피곤한 담배 연기가 뿜어나올뿐 사람도 자취도 없다. 점점 이웃이 없고 사람이 안 보이는 동네가 되어간다. 젊은 부부들도 애가 없는지 골목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도 안 들린다. 이게 요즘 서울 우이동 쌍문동의 맨 얼굴이고, 지난 20여년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세워온 기득권자들이 변두리에 만든 서울 풍경이다.
보스코가 재속프란치스코회 서울 회원들에게 강연을 하러 나간 터여서 나는 국염씨랑 4·19탑 앞에 있는 보리밥집에서 만났다. 보리와 쌀이 반반이라야 한다며 무채, 콩나물, 쑥갓. 돈나물, 취나물을 넣고 들기름 한 수저, 고추장 반 수저에 된장찌개 푹푹 넣어 쓱쓱 비볐다. 식당 앞 4·19탑 입구에서는 기호 3번 누군가를 찍어야 한다며 비명을 질러 대고, 숟가락에 수북한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기는 하는데 그 밥이 뱃속으로 다 넘어 가는데도 허기진 배는 점점 더 꼬부라지기만 한다.
4·19의 주인공들은 대한민국에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하여 민족의 하나됨이나, 민주니 자유니 평화니 정의니 하는 것들도 선거구호에서 사라졌다. 오로지 경제다. 저러니 “잘 살아 보세!”하던 박정희와 그 딸과 그 패거리들이 득세할 수밖에... 우리 국민이 꿈꾸워온 이념들은 배부른 돼지들의 발밑에서 그 돼지들이 싸놓은 오물에 섞여 짓밟히고, 뜻있는 시민들에게는 절망만 기다리는 4월이다. 과연 그러기만 할까?
‘전라도 닷컴’의 황 편집장은 그래도 외친다, ‘천하대본’ 농사를 놓지 않는 일도, 세월호 진상을 밝히는 일도, 마르스역병의 고비를 넘기게 된 것도, 질곡의 과거사를 곧게 펴는 일도 기실 백성들의 몫이라고! 밟고 짓이겨도 끝내 꺾이지 않는 풀뿌리의 저력만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역사를 남긴다고!
울면서 꾸역꾸역 밥을 먹듯 하고 우리 둘은 4·19탑을 방문했다. 공원 전체는 많은 꽃들이 자리를 잡고 이름답기 그지없지만, 내 평생 그렇게 화려하고 깨끗하고 찬란하게 피어오른 두견화(진달래)는 처음 보았다. 먼 옛날 불타오르던 영혼들이 피를 토하며 지금 우리들을 위로해 주는 외침 같았다.
우리 둘은 지금 닥치는 어려운 가정사, 앞으로 닥쳐올 불투명한 장래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굽은 허리 뒤로 휘어져 핀 싸리꽃(조팝나무)이 휘어는져도 꺾이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염씨는 평생을 쏟은 지금의 활동을 접어도 여태까지처럼 무엇이든 잘 해낼 게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업주부’로 주저앉은 나로서는 그니가 사회의 최전선에서 벌여온 투쟁과 헌신에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그니를 동창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니도 대단한 풍파를 일으키고 내가 이룬 가정과 부부생활이 주변에 본보기로 얘기할만한 사례가 되었다며 축해해준다.
간만에 만났기에 헤어지기 아쉬워 동대문까지 함께가서 보스코와 내 생활한복을 사고, 국염씨는 바바리코트를 하나 샀다. 좌판에서 막 지져낸 빈대떡도 한 조각 먹어보고, 먼 훗날 우리가 홀로 남는다 해도 서로를 기억할 일들을 했다.
보스코는 정동 회관에서 ‘강남’의 프란치스칸들에게 교황의 ‘찬미받으소서’ 회칙을 받아들일 맘준비를 시키고나서 토요미사로 주일을 지내고 온다기에 나도 우이성당 6시 저녁미사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