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4일 월요일, 맑음
비온 뒤 갠 하늘은 티 하나 없는 도화지다. 거기 불쑥 손 뻗은 높다란 봉우리들이 그림을 그릴까 종이접기를 할까 망설이는 중이다. 며칠 새에 앞산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교실에서 만난 친구들이 머리 하나 만큼 훌쩍들 커버리듯, 엊그제 여린 연두색에서 검은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보스코는 매일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번역을 한다. 다행히 분도출판사에서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교부총서’를 간행하므로, 그것도 라틴어와 우리말 대조본으로 출판하므로 그가 온 정열을 쏟아 이 작업을 할 만하단다. 아우구스티누스 전집을 그렇게 대조본으로 낸 곳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밖에 없고 영어권과 독일어권은 대조본을 이제 시작하는 중이란다.
‘우이동 시인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임보(林步) 시인(랭보를 좋아해서 이 예명을 쓰는 강홍기 교수)이 지난 봄 ‘우이동 북한산 진달래제(祭)’에서 당신이 「시와 시인을 위하여」라는 책, 시인을 만드는 책을 냈으니 한 권씩 사서 보시고 선전도 해 주시라는 당부를 한 적 있다. 오늘 온 월간지 「우리 詩」에 “베스트셀러 작전”이라는 신작시를 올려놓았다.
몇 년을 벼르고 별러 쓴 책이 출간되었는데도 세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를 민망히 여긴 동료 시인들이 저마다 한 가지씩 묘책을 내놓더란다. 누구는 지하철 외판원으로 나서보겠다고, 누구는 상계동 어느 교차로 목 좋은 곳을 봐 두었으니 거기서 외쳐보겠다고, 누구는 인터넷에 올려 페북이나 트위터로 그럴싸하게 선전을 해보겠노라고, 누구는 다단계 전략을 내세워 한 사람이 두 권을 사서 두 사람에게 나눠주고 그 사람이 두 권을 사서 두 사람에게 나눠주게 하겠다는데 임보 시인은 세상 물정 모르는 시인들을 앵벌이로 만들 것 같다면서 탄식한다는 줄거리다.
요즘 책 사보는 사람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힘들다 보니 시인이나 소설가나 학자들은 머지않아 실업자로 굶어죽어야 할 게다. 스마트폰에서 카스에 오를 200자 정도의 글이나 소화하며 낄낄거리느라 책 한 권 펴들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서기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의 대조본 신학서적을 어떻게 읽을까? 그래도 번역하고 역주를 다는 학자들이 있고, 그것을 출판하고 보급하는 분도출판사가 있고, 벽돌만큼 두툼한 그 책을 사서 보는 사람들이 있다니 모두가 오로지 경탄스럽다.
서가에 꽂혀 있는 보스코의 아우구스티누스 역주서(분도)와 다른 고전 역주서(경세원)
임보 시인의 블로그를 검색하던 보스코가 박희진 시인과 이무원 시인의 부고를 발견하고 놀란다. 지난 달에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박희진 시인(85)은 허연 백발과 수염을 하고 ‘호일당(好日堂)’이라는 호를 갖고 4행시, 1행시, 17자시, 13행시 등의 형식을 개척하신 분이다. 오랫동안 우리 이웃 ‘우이빌라’에 사셨고 동네 길거리에서 나를 만나면 무척 반기면서 한참이나 안부인사를 주고받았지만 독신생활을 해 오신 쓸쓸함이 늘 배어 있었다.
박희진 시인이 증정해주신 시집들
이무연 시인(보스코와 동갑 74)은 늘 ‘물’을 노래하던 분(첫 시집[1980] 제목이 「물에 젖은 하늘」)으로 서명해 증정해준 「빈 山 뻐꾸기」가 휴천재 책장에 꽂혀 있다. 지난 봄 진달래 축제에서도 건강한 몸으로 만났는데 갑자가 돌아가신 교장선생님이다. 하느님이 지으신 세상을 맑게맑게 노래하던 분들이니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씀드리며 창조주의 반가운 마중을 받으시리라 본다.
오늘 산청의 약초박람회에서 거제 바올라씨를 만나기로 했었는데 2일에 산청에 다녀오고서는 그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보스코랑 갈 곳은 꼬박꼬박 기록해 두는데... 아차! 하는 실수로 소중한 친구와의 만남을 놓치고 말았다. 내가 참 한심하다.
미루씨가 사다 맡긴 두릅순으로 오늘 장아찌를 담아 두 집이 나누었다
오후에 읍에 나가 벌침을 맞고 왔더니만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그 지경에도 내일 올 손님들 음식을 장만하다 지칠대로 지쳐 이층 서재로 올라와 소파에 누웠더니만 “머리 아프면 약 타다 줄까?” 하고 묻는다. ‘아니, 마누라가 아프다면 쏜살같이 약을 타다 바쳐야지 묻긴 뭘 물어?’ 하며 심통이 좀 났지만 ‘예’와 ‘아니오’보다 긴 대답의 언어, 더구나 알아서 해주는 인심전심의 언어는 좀처럼 못 알아듣는 게 남자라는 사실을 내가 깜빡 했나 보다. 내 두통에 잘 듣는 ‘오키’를 물에 타주면서 "왜 여자는 저리도 복잡할까?" 하는 시선으로 내 눈치를 본다.
"가사를 돌보는 틈틈이 집필을 하노라."는 보스코의 아침 설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