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사도 14,20ㄴ-27)
<하느님께서 그들을 도와 이루어 주신 일들을 보고하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시편(144)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당신을 들어높이나이다
영영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제2독서(묵시 21,1-5ㄱ)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리라>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복음(요한 13,31-33ㄱ.34-35)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활 제5주일 독서·복음 해설
제1독서(사도 14,20ㄴ-27) 해설
<사도는 교회 공동체들로 하여금 상호 긴밀한 연관을 맺게 해주고 단결하게 해주는 ‘종’이다>
맡은 사명을 다한다: 바오로는 첫 선교 여행을 마치고서 안티오키아로 돌아온다.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바오로는 당시 그리스 세계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기 위해 교회로부터 파견 받은 바 있다. 바오로는 특히 자기가 세워 놓은 젊은 공동체들로 하여금 자기들에게 들이닥치는 박해와 맞서도록 하고 그 교회들을 활성화하기 위해 ‘원로들’을 뽑아 세우는 데 특별히 많은 신경을 썼다.
공동체들을 단결하게 하는 데 몸 바치는 ‘종’: 나라가 다시 통일과 부흥을 이룩할 위대한 날을 기다리면서 이방인 백성들과 거리를 둔 유다인 공동체들과 달리, 바오로가 세운 공동체들은 본질적으로 이방인 백성들에게 열려 있다. 그 공동체들은 사도 바오로와 끊임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바오로는 그 공동체들로 하여금 계속 서로 접촉하고 연관을 맺도록 해 주었다.
교회 안에서 사도가 맡은 임무는 신자 공동체로 하여금 자기 속에 갇혀 있지 않고 다른 모든 공동체들과 함께 호흡하고 공동보조를 맞추며, 모든 사람에게 열린 자세로 동분서주하면서 온 몸과 목숨까지 바치는 충실한 ‘종’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긴밀하게 맺어져 하나로 뭉친 공동체들은 세상과 역사 한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나눔의 정의)을 전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어 하느님의 자녀들을 모아들이는 본연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시편(144) 해설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당신을 들어높이나이다. 영영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이 시편은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로서 하느님의 어지심과 자비로우심과 왕권을 기념한다. 시편작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온갖 차별과 분열과 억압과 착취와 불의를 매우 못마땅해 하신다.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을, 잘생긴 사람이 못생긴 사람을, 영리한 사람이 미련한 사람을, 힘센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유능한 사람이 무능한 사람을, 부강한 나라가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를 업신여기고 빼앗고 침략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신다. 하느님 나라는 온 인류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상태를 말한다.
제2독서(묵시 21,1-5ㄱ) 해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창조주와 더불어 벌일 혼인잔치를 기다린다>
결혼예식을 올리는 신부가 가장 아름답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바르게 살고 자비롭게 서로 용서하며 이웃의 짐을 져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공동체에 숨어 있을 뿐이어서 그렇지, 실상은 결혼예식을 치르려는 신부보다 훨씬 아름다우며 마침내 그 아름다움은 만 천하에 밝히 드러날 것이다.
묵시록은 변화한 인류가 자기를 만들어 낸 창조주와 더불어 올리는 결정적인 결혼식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 날에 본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신랑이 올바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물과 슬픔을 말끔히 씻어 줄 것이다. 그 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사람들과 함께 계시면서 죽음과 슬픔 따위의 고통을 없애 주실 것이다. 그 날 인류는 영원한 젊음으로 빛날 것이며 더 이상 늙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은 또 악령을 상징하는 지옥의 용이 거처한다는 바다가 이집트 탈출 때처럼 하느님 백성의 진군 앞에 스러지고 말 것이다.
흔히 숨어계신 듯한 하느님께서 그 날에는 드러내 놓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되실 것이며, 사람은 늘 수수께끼 같고 알 수 없던 자기 본모습을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복음(요한 13,31-33ㄱ.34-35) 해설
<아버지께서 부활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우리 생활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넘치기를 바라신다>
‘새로운 계명’에 대하여 언급한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유언이다. 이 유언은 요한 복음서 저자가 수난 이야기 앞에 배치한 고별사의 축을 이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셨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생명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천상 영역에서만 살고 계시지 않으신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었다.
히브리인들에게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온전한 가치가 드러나게 됨을 뜻한다.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실존의 귀중함을 일깨워 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같이 사람들도 서로 극진히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사랑은 기쁨을 샘솟게 하여 더 나은 밝은 사회를 창조해 낸다.
묵상
예수님께서 받으신 영광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영광을 받으신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묵시록에 의한 오늘 독서는 종말론적 혼인잔치에서 그리스도와 선택받은 사람들이 받게 될 결정적인 영광의 순간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지상에서 살 동안 ‘사랑 가운데서 사랑하면서 살아가라고’ 권고하며 가르친다.
구약시대에 이미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바 있는 주님의 영광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완전하게 계시되었다. 하느님의 영광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빛나게 된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신다.”(히브 1,3)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이 그분 얼굴 위에 빛나게 된다(2코린 4,6).
하느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전 생애에 그리고 그분의 행위 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그 영광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서 그 빛을 발산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고(14,31) 당신 목숨을 바침으로써(17,19)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다. 그래서 십자가는 당신을 봉헌하신 증표와 상징이 되었다(12,32). 그 분 옆구리에서 솟아난 물과 피는 당신이 죽음으로 얻은 풍요한 결실과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샘이 되심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승천으로써 아버지께서 천지창조 이전에 당신에게 주신(요한 17,24) 영광 안으로 들어가셨다(루카 24,26). 그리고 이 영광은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다(티토 2,13).
우리가 받을 영광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 위에 당신 영광을 빛나게 하신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 영광은 당신처럼 살아가려는 당신 제자들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요한 17,10). 십자가의 제사가 아버지와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제자들 안에서다(15,8).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와 성령께서 그 영광을 이룩하신다(요한 1서 5,7). 그 영광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풍요함을 깨닫고 차지하게 된다(요한 16,14-15). 그리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겪는 수난과 고통과 죽음이 영광과 부활로 변한다(1베드 4,14). 그러므로 부활하신 분의 영광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 안에 반영되어 그들을 더욱 영광스럽게 바꾸어 간다(2코린 3,18). 그래서 신자들은 종말론적 영광을 기다리면서 살아간다.
그 영광이 완전하게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이 지상생활을 거치는 동안 오직 한 가지, 사랑이라는 유일한 법칙을 따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여 보여 주신 새로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제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윤리규범은, 사람은 본래 제 스스로 영광을 취할 수 없고 오직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셔야만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누어 받고 직접 도와주는 몸 바침을 통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내미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늘 보여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