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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어버이’와 ‘후레자식’
  • 전순란
  • 등록 2016-04-27 10: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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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6일 화요일 맑음


보스코가 배밭에 약치는 소리가 열린 창문으로 들린다. 본래 흑성병, 적성병(잎과 가지는 물론 과일까지 까맣게 상한다)을 막으려면 꽃 피기 전에, 꽃이 진 후, 그리고 배를 봉지로 싸기 전에 세 번은 쳐야 하는데 농사 잘 지어 봤자 물까치만 좋은 일이라는 맥 빠지는 푸념에 보스코도 소독할 엄두도 안 내고 나도 일깨워줄 마음도 없고 지내다보니 첫 번 소독을 거르고 말았다. 우리가 고생한 소득물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거나 한다면 신날 텐데, 미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고것들이 남겨놓은 것만 감지덕지 얻어먹어야 한다는 게...


하기야 병아리 적에 암컷만 남겨 몇 뼘 창살에 가둬놓고 24시간 전등을 켜두어 밤낮을 구분 못하고 알만 낳게 해서 빼앗아먹다 폐닭이라고 통닭집에다 처분하는 인간은 얼마나 더 잔인한가! 더구나 A1이라는 조류독감이 돌면 수백만 마리를 살처분해서 묻어버리는 인간들이 물까치떼한테 불평할 자격이나 있느냐는 게 교황 프란치스코의 ‘생태복음서’ 「찬미받으소서」의 골잔데...



휴천재 올라오는 길을 포장하느라 아침 일찍부터 사람소리가 들린다. 젊은이 너댓명이 와 있다. 우리 집 올라오는 길이 좁아 레미콘 차는 못 올라오고 레미콘에서 세렉스 트럭에 콘크리트를 받아서 실어 나른다. 트럭이 쏟아내는 콘크리트를 짧은 시간에 펴고 들쑤셔 고루 깔고 표면은 반들반들하게 마무리하는 작업이 능숙하게 이루어진다.


집 지을 때도 ‘공구리 치는 날’이라면 건축주나 감독이 긴장을 하여 일꾼들에게 고기에다 술에다 대접을 하면서 비위를 맞춰주는 것으로 봐서, 장화 차림으로 그 반죽 속에서 휘청거리는 젊은이들을 보면 무지무지 힘들겠다는 걱정부터 든다.


사장(십장) 종규 씨는 35세, 친구 정우 씨도 35세, 마무리꾼 성철 씨가 가장 맏형인데 46세(아저씨라면 질색을 하며 총각임을 극력주장한다)라는데 젊은이들이 이런 막노동의 현장에 뛰어든다는 게 안쓰럽기도 했지만 직업의 귀천을 안 가리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기특도 하다.


함양 제일의 마무리 솜씨를 자랑하는 성철씨 


도로포장일자 2016.4.26 


보스코 머리 염색할 때는 다가오고 길게 자라 꺼벙해서(내일 부산에서 강연까지 있는 터에) 머리 깎으라고 함양에 데려다 주러 집밖으로 나가다보니 이런! 오후 2시 넘어까지 점심도 미룬 채 포장을 막 끝내고 간 길을 어떤 미친놈이 트럭으로 짓밟고 지나갔다! 아직 안 굳은 윗길은 차바퀴에 눌려 수명이 절반으로 줄었겠고 아랫길은 곤죽을 만들어놓고 도망가버렸다.


내가 핸드폰을 때려 비상사태를 알렸더니만 십장 종규 씨가 밥 먹으러 가다가 차를 되돌려 와서는 울먹이는 소리로 욕을 해대며 펄쩍펄쩍 뛴다. 도대체 누굴까? 출입금지푯말도 치우고 기어이 들어와서 이런 사고를 치는 파렴치한은? 그러고서 줄행랑치는 얌체라니! 바퀴자국으로 미루어 포터형 트럭이다! 늘 지나다니던 행상인가? (뒤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함양 어느 농약사 트럭이 고추모종을 싣고 가면서 이 짓을 저지르고 가버리더란다)



일꾼들은 끝없는 저주를 퍼부으면서 곤죽을 다시 펴드니만 조금 뒤엔 “도망간 그 인간 꽁지가 빠졌겠다. 우리보다 더 불쌍하니 빨리 끝내기나 하자”며 서로 격려한다. 육체를 움직이며 내 힘으로 살아가는, 참 쓸 만하고 아량 있는 젊은이들이다. 폭로되는 뉴스로 미루어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국정원의 지휘를 받고, 전경련에서 일당을 받아가면서 온갖 정치판을 휩쓸고 다니는 ‘어버이'연합 늙은이들보다 훨~ 났다. 저자들의 이름을 바로잡는 뜻에서 젊은이들이 ‘후레자식’연대까지 띄워야 하는 대~한민국! 


보스코가 머리를 깎는 사이에 나는 장에 가서 텃밭에 심을 모종을 샀다. 고추는 아삭이, 큰 것, 작은 것, 땡초, 보통으로, 토마토는 대추방울과 찰토마토로, 오이는 보통과 가시오이로, 호박은 민호박과 맷돌호박으로 샀다. 가지, 파프리카, 케일도 샀다. 


어둑해질 때까지 텃밭 두럭에 모종들을 심고 7시가 넘어 집에 올라와, 오늘 택배로 도착한 전복으로 딱 두 사람 몫의 죽을 쑤어 보스코랑 먹으려는 순간. 창밖을 내다보니 유영감 님이 논둑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식사는 하셨냐고 물으니 논에 모판을 만들고 나니까 너무 힘이 들어 일어설 기운조차 없단다. 


죽을 쑤었으니 한 술 들고 가시라 초대하고 얼른 들어와 상을 차렸다. 독거노인이 죽을 맛있게 잡숫고 우리와 한참이나 환담을 하다 내려가시는 뒷모습을 보니 비록 배는 한 끼를 굶었어도 가슴이 참 따스해온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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