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시복 안건이 시복 문서를 제출한 지 7년 만에 교황청 시성성의 성덕 심사를 통과했다. 바티칸라디오는 27일 알바니아 공산치하에서 순교한 38명의 순교자가 시복된다고 발표하며 한국의 최양업 토마스 사제의 영웅적인 덕행을 인정해 가경자로 선포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28일 최양업 신부의 삶과 시복추진 과정 등을 덧붙여 가경자 선포내용을 전하며 앞으로 최양업 신부가 ‘기적심사’를 통과하게 되면 시복에 이르게 될 것이라 밝혔다.
주교회의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 안건이 2016년 3월 14일 추기경과 주교들의 회의를 통해 교황청 시성성의 성덕 심사를 통과했다”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6년 4월 26일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을 접견하시고, 최양업 신부의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시성성 교령을 승인하셨다”고 밝혔다.
‘가경자’란 교황청 시성성 시복 심사에서 영웅적 성덕이 인정된 ‘하느님의 종’에게 붙이는 존칭으로 시복 후보자에게 주어지는 존칭이다. 가경자로 선포되면 그때부터 교회는 공식적으로 증거자를 공경할 수 있다. 가경자로 선포된 증거자는 그의 전구(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간청하고 탄원하는 행위)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음을 입증하는 ‘기적심사’를 통과하면 시복이 결정된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 추진은 1996년 청주교구 배티 성지에서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을 간행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주교회의는 1997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한국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 추진을 결정하면서 최양업 신부의 시복 안건도 함께 논의했고, 2001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 안건의 청구인으로 절차를 진행할 것을 결정했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 추진이 같은 시기에 추진된 순교자들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기적심사’ 때문이다. 시복 시성에 관한 교황령과 지침 등에 따르면 순교자는 순교 자체가 기적으로 인정돼 ‘기적심사’가 면제되지만, 증거자는 ‘기적심사’를 거쳐야 한다.
‘기적심사’를 담당하는 기적심사 법정은 최양업 신부의 전구로 기적을 받은 사례에 대한 제보를 판별해 교황청에 보고한다. 앞서 2007년 4월 15일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는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적심사에 즈음하여”라는 담화문을 통해 신자들에게 최양업 신부의 전구를 통한 기적 사례를 제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신학생이고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사제다. 지난 1984년 시성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2014년 시복된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1821년 충남 청양 다락골 인근 교우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1835년 말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됐으며, 1836년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최방제는 유학 도중 1837년 열병으로 사망했으며, 먼저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도 조선으로 귀국한 지 1년여 만에 잡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귀국한 직후부터 전국의 신자 공동체를 찾아다니며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11년 6개월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목방문을 하면서도 한문 교리서·기도서를 한국어로 번역했고, 순교자들의 기록을 수집했으며, 선교사의 입국을 돕고 조선 신학생들을 유학 보냈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경남 지방 사목 방문을 마치고 서울로 가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6월 15일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천주교에서는 순교로 신앙을 증언한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로, 당대 유일한 한국인 사제로 조선 전체를 돌아다니며 사목활동을 한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로 공경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