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일 일요일, 맑음
시인의 집은 우리 우이동집 올라가는 마지막 골목 오른쪽 모퉁이에 있었다. 나지막한 국민주택 지붕위로 가난한 아내는 가난한 시인 남편을 위해 겨우 기어올라갈 만한 낮은 다락과 북한산이 바라보이게 한뼘 창을 내어주었다. 욕심이라곤 도대체 없는 시인의 소망대로 백운대와 인수봉 자락을 눈에 들여놓고서 산자락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갔고 아이들은 커가고 시인은 허리가 구부정해지기 시작했다.
시인의 아내답게 그니가 욕심 낸 것이라곤 손바닥만한 정원에 빈자리 없이 심고 가꾸는 꽃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넘치도록 행복해하는 그니에게서 내가 부러워한 것이 딱 하나였으니 두 아들에 보태서 두 딸이었다. 사내애들은 비온 뒤 올라오는 탐스럽고 굵은 죽순 같았고, 여자애들은 늘 방글방글 웃는 모습이 엄마의 뜰에 봄이면 마구마구 피어오르는 마가렛 같았다.
채시인의 우이동집 다락창문에서 올려다 보였을 삼각산
그 가족은 모두 그 집을 자랑스러워했고 사랑했다. 그런데 그 가족이 왜 그 집을 떠났는지, 또 전혀 다른 주택문화인 아파트 생활을 어떻게 견디는지는 내가 차마 묻지 못해 지금도 모르겠다. 그러다 작년 이맘쯤 (2015.5.14)에 우이동 시인들 네 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을 적에 채시인이 오셨고, 어제 ‘북한산 시화제’에 가서 이인평 시인한테서 채희문 시인의 소식을 들었다. ‘가을렛슨’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분이다.
부정맥으로 고생하다 혈전이 머리에 걸려 뇌혈관이 터져 쓰러졌는데 언어를 관장하는 왼쪽 핏줄이 터져 말을 못한단다. 평소에도 워낙 과묵하고 나서는 일이 없으며 당신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별 볼일 없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벗이 되어 살아온 분이다. “병수발 하느라 고생 많겠어요.”라는 내 인사말에 “그렇게 좋은 사람과 50년을 넘게 살았으니 그 은혜를 갚는다 생각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란다.
작년 이맘때 우리집을 찾으신 채희문, 홍해리, 이생진, 임보 시인
80을 바라보는 이 부부의 모습에서 “참 잘 사셨구나!” 하는 향기가 전화선으로 풍겨온다. 시인의 꽃은 언어인데 어서 회복되셔서 병상에서 천국 담장안을 슬쩍 넘겨다본 풍경을 시로 읽고 싶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채 시인은 늘 “북한산 기도”를 적어오셨다. 가장 최근에 낸 시집 「소슬비」(황금마루)에서 그려낸 “요즘 일과”를 몸소 살고 계시는 분이다
요즘 하는 일은
주로 바라보는 일
미워하거나 화내지도 않고
탓하거나 서운해하지도 않고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잘 들리지 않는 귀로
좀 뒤로 물러서서
바보처럼 바라보거나
그저 듣기만 하는 일
아니면 가을밤에 가랑잎 굴러가듯
덧없이 떠나가는 것들을 향해
사랑과 연민의 눈길로
용서와 감사의 미소로
석별의 손을 흔들어 주는 일
- 채희문
휴천재 가는 길
일요일 아침이어서 서울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붐빌까 일찍 서둘렀다. 정옥씨가 오랜만에 올라와 웬만하면 함께 내려갈 텐데 내일 한신여동문회 친구들이 휴천재를 찾아온다 해서 마음이 바빴다. 그래도 대진고속도로로 들어오면서 덕유산에 봄 치장을 멋지게 해내는 녹음을 보자 가슴이 설렌다. 옆에 앉아 오면서도 피곤하다던 보스코도 산을 보자 생기가 돋는다. 어느 새 오월이다.
집에 도착하여 보스코는 2층에서 물건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챙겨 내려온다. 나는 우선 화분의 꽃들을 살피고 물을 주고 텃밭으로 갔다. 내가 없는 사이에 상추와 당근들이 예쁜 팔을 뻗어 인사를 건넨다.
저녁으로 보스코에게는 호박죽을 햬 주고 나는 내일 저녁준비로 밤늦게까지 분주했다. 종일 운전하고 내려와 자정까지 근무를 하면 ‘특근수당’을 받아야 할 텐데 누구한데 받지?
적상산
덕유산
지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