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다. 2007년 5월 17일에 세상을 떠난 권정생 선생은 5월이란 이미지처럼 푸르게 살다 떠난 사람이다. 올해가 서거 9주기이고 내년에 10주기를 맞이한다.
필자는 지난 1월 故 신영복 선생 추모글에서 권정생 선생을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그전에 대구에서 벗들과 2008년 5월 권정생 선생 서거 1주기를 맞아 『애국자가 없는 세상』이란 문집에 공저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이 세상을 떠난 시기로 두 어른과 권정생 선생을 비교하는 글을 썼다.
권정생 선생을 한명의 동화작가로만 기억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는 시집과 산문집, 소설을 내기도 했던 전방위 문학가이다. 또한 산문집으로 문학을 넘어 철학과 비판정신을 보여준 우리 시대 사상가이기도 하다. 이명박정권 당시 국방부가 그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을 금서로 지정할 정도이다.
이오덕, 전우익, 권정생 이렇게 세분을 영남 3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세분의 공통점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과 어린이들을 사랑한다는 것, 자연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가장 큰 특징은 인세수입이 많은데도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다.
필자가 권정생 선생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가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결핵에 걸렸었다. 오래 못 산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2007년(71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필자는 당시 어려웠던 시기에도 따듯했던 이웃들과 교회당 문간방을 내주고 종지기로 일거리를 준 목사가 아니었다면 거리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권정생 선생은 개신교 신자였지만 삶은 가톨릭 수도자와 같았다. 기도와 노동으로 살았고 자연과 벗이 되었다. 도시와 떨어진 농촌마을에 있으면서도 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교회당 종지기로 일하면서 책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때부터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 가난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이라크 어린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던 분이다.
개신교회의 문제점들을 외면하지 않고 비판하기도 했다. 일부 목회자들의 배타성과 우리말 파괴를 지적했다. ‘목사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글을 가톨릭 성직자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로 바꿔 읽어도 될 정도이다.
그는 다른 신앙에도 열린 마음을 가졌다. 개신교 집사이기도 한 권정생 선생의 많은 책들이 가톨릭계 출판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스님에게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점술인이나 무속인도 불러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열린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무슨 교회’란 이름 대신 ‘아무개네’라고 이름 짓고 십자가를 달지 않아도 되는 신앙공간을 꿈꾸기도 했다.
벗인 정호경 신부와의 우정으로 선생의 신앙이 열린 신앙으로 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고아인 정호경 신부와 마음이 많이 맞았던 것 같다. 살아 있을 때 정호경 신부를 모델로 동화를 쓰기도 했다. 사제와 개의 우정을 다룬 동화라고 한다. 죽기 전 정호경 신부에게 따로 유서를 남길 정도였다. 정 신부는 선생의 유택에 찾아가 선생과의 우정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란 동화는 실제로 집을 찾아온 생쥐와 친구가 되면서부터 쓴 동화이다. 그 작품에서 눈에 띄는 내용이 있는데 ‘만들어진 하느님’에 대한 묘사이다. 사람의 욕심으로 만든 하느님이란 것을 읽을 때 가톨릭 교회 안에도 만들어진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권정생 선생은 항상 남루한 옷차림으로 가난하게 살았고 외출할 땐 가방 대신 보자기에 책을 몇 권 넣어가기도 했다. 문학상을 받길 거절했으며, 예전에 어느 예능프로그램에서 권정생 선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을 선정했으나, 아이들의 책 읽을 자유를 어른들이 뺏을 이유가 없다며 선정을 거절하기도 했다. 이 일화는 권정생 선생의 겸손함을 보여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과 집사로 사역했던 교회당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혼자 사는 가난한 어르신인 줄로만 알았는데, 전국 각지에서 온 추모행렬을 보고, 많은 인세수입을 받는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교회당의 어느 사람은 형사들이 선생의 집을 찾아온 일화도 소개해 주었다. 필자도 부끄럽지만 권정생 선생을 유치한 동화작가로만 알았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이 선종하기 전 「우리들의 하느님」을 읽고 많이 놀랐다.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하는 아쉬움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권정생 선생이 지금도 살아계셨다면 파괴된 4대강과 새만금, 설악산 케이블카,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제주 강정 해군기지에 분노하셨을 것이다. 벗의 신앙으로 존경했지만 이제는 점점 돈에 물들어가는 가톨릭교회의 현실에 분노하셨을 것이다. 후쿠시마 핵사고와 지진,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전쟁에 희생된 아이들을 보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었을지 모른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희생자들 생각에 무척이나 마음 아파하셨을 것이다.
안동에 권정생문학관이 있다고 한다. 애초에 선생의 뜻과 맞지 않았다. 선생은 시신과 집을 태워서 없애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 선생의 뜻을 거역하고, 뜻 있다는 사람들이 문학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문학관은 현재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없고 청도송전탑 피해어르신들을 대화를 거부하고 경찰을 불러 쫓아낸 사람이 경북도자사로 있어 그런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차라리 만들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 문학관을 집 없는 사람들과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나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 바꾼다면 좋을 것이다.
이제 내년이면 10주기를 맞는 故 권정생 선생을 추모한다. 그리고 그분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만들길 다짐한다.